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세돌과 알파고 간 대국 이후, 서양음악계에서도 인공지능은 토론의 현장에서 한 번쯤은 꼭 언급되는 이슈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 인공지능 이슈가 떠돌기 시작했을 때는 인공지능이 창작이라는 성역에는 접근하지 못하리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 같다. 인공지능이 옛 작곡가의 음악을 학습해 이른바 바흐풍이나 모차르트풍의 음악을 만들었다거나 정장을 갖춰 입은 로봇 연주자가 연주자와 무대에서 연주 대결을 펼쳤다는 소식이 화젯거리가 됐지만, 그래도 ‘음악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반응이 조금은 더 지배적이었다. 답습은 가능하나 창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간 서양음악계에서 느낀 중론이었다.
하지만 기술은 매일같이 갱신되고, 세간의 분위기도 그에 맞춰 변화하고 있다. 다소 방어적 태도로 인공지능의 능력치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판단하던 그간의 흐름과 달리, 근래엔 ‘인공지능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동시에 적극적 협력 구도가 점점 더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티스트와 AI가 함께 디제잉을 하거나, 인공지능 개발자와 작곡가가 공동으로 음악을 작곡한다는 식이다. 이런 이슈를 하나둘씩 따라가다 보면 ‘음악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곰곰이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은 인공지능이 협력의 주체로 묘사되지만 언젠가는 그 관계가 역전돼 사람이 인공지능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도구가 된다면, 혹은 인간과의 협력 없이도 음악이 만들어진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인공지능에 관한 음악계의 이슈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윤리와 기술, 개념 등 드넓은 영역에 포진해있다. 그 수많은 문제 중에서도, 한 명의 청취자로서 내가 최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대체 어떤 새로운 음악이 나타날지다.
20세기 초, 서양음악계에는 ‘자동피아노’라는 묘한 사물이 등장했었다. 인간 대신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 장치는 처음에 악보 위에 적힌 음표들을 기계적으로 재생하기만 했으나 점차 인간의 연주라는 섬세한 행위를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재생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세간의 반응은 극단적이었다. 누군가에게 이것은 희망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불온한 침입자였다. 자동피아노는 짧은 호황을 누린 뒤 점차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지만, 이 기계장치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남겼다. 인간은 연주할 수 없지만 ‘자동피아노로만 연주할 수 있는’ 음악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음악들에는 열 손가락으로는 도무지 연주할 수 없는 수많은 음과 엄청나게 빠른 연타음, 계산하기 어려운 복잡한 리듬 등이 가득했다. 그건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생경함이었다. 나는 그 음악들을 듣고 나서야 연주의 근본 조건에 ‘인간의 신체’가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고, 연주를 이전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됐다.
인공지능에 관한 소식을 접할 때면 종종 이 자동피아노로만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떠오른다. 그것은 연주의 영역에서 인간조건을 넘어선 음악이었다. 이제는 이와 유사한 일이 창작의 영역으로도 퍼져나가고 있다. 한편 어떤 이들은 변화하는 것이 창작만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4월에 열린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의 포럼 ‘음악의 텍스트와 동시대성을 다시 생각한다’의 토론에서는 우리가 인공지능이 만든 음악을 듣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음악을 듣고 판단하는 ‘감상의 주체’ 또한 기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언급됐다.
인공지능만이 만들고 향유할 수 있는 음악이 정말로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우리가 환영하게 될지, 두려워하게 될지는 나로선 감히 추측하기 어렵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는 이 변화의 현장에서 내가 소박하게나마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인간의 음악이 어떻게 펼쳐져왔는지를 차근히 반추해볼 기회다. 인간조건을 넘어선 음악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 새로운 음악을 이해하게 되기도 하겠지만, 이제까지의 인간의 음악에 어떤 조건이 숨어있었는지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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