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계절로 피어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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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계절로 피어나는 음악

어떤 음악은 세상의 변화 속도와 유행에 상관없이, 수도자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음악을 알리는 데 발매일은 중요하지 않다. 바람의 변화가 그 음악을 품을 때 소개하는 자는 듣는 자에게 이어폰 한쪽을 건네고 싶어진다.

 

뇌수까지 끓이는 듯했던 더위가 농담이었던 양 사라지고 아침저녁마다 거짓말처럼 선선함을 느끼는 계절이 불쑥 찾아왔다. 약 한 달 전에 발매된 음반 한 장을 꺼내려고 한다. 이때를 기다려 꺼냈다. 장필순의 여덟 번째 작품 <소길花>다.

 

JTBC 방송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 중에 가수 이효리, 아이유 출연 장면

 

몇 해 전 이맘때였다. 이제는 <효리네 민박> 덕에 누구나 아는 동네가 된 제주도 소길리, 제주도 중산간에 위치한 그 마을은 개발이나 관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가까이엔 숲이 아무렇게나 우거졌다. 한 시간에 한 번 농어촌 버스가 다니는 외진 곳이었다. 거기서 하루를 머물렀다. 좋은 사람들과 밤새 술을 마신 후 늦도록 잤다.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텃밭이라고 하기엔, 꽤 많은 작물이 가꿔진 마당에 놓인 평상에서 시간을 흘려 보냈다. 저녁이 될 때쯤 길을 나섰다. 차가 없었기에 애월 큰 도로까지 한 시간을 걸어야 했다. 소길리에서 내려가는 길에는 상가리, 하가리 같은 이름이 쓰인 이정표가 보였다. 눈앞에 숲이, 그 앞에는 바다가 들어왔다. 아름답게 푸르던 하늘이 더 아름답게 물들 무렵이었다. 말 그대로 한 줄기 바람이 바다에서 산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마음의 바닥으로부터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가을이구나. 계절의 스위치가 켜졌다. 장필순과 조동익이 사는 소길리에서 보낸 하루가 영원히 새겨지는 찰나였다.

 

<소길花>는 그 시간들을 본능적으로 소환한다. 2002년 6번째 앨범인 <Soony 6> 이후 장필순은 그의 음악과 인생의 동반자, 조동익과 함께 제주도 소길리에 내려갔다. 잡초를 뽑고 밭을 일궜다. 나물을 심고 꽃씨를 뿌렸다. 유기견을 키우고 땔감을 모았다. 일평생을 도시에서 보낸 음악가의 삶에 섬 촌부의 육체적 삶이 빼곡히 스몄다. 뜨문뜨문 음악을 했다. 함춘호와 함께 CCM 앨범을 냈고, 가끔씩 서울에 올라와서 공연을 했다. 음악가로서의 장필순과 제주 생활인으로서의 장필순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음악가들이 대체로 그렇다. 7집 <Soony 7>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겪었던 그 하루가 <소길花>에서 소환된 것은, 이 앨범에 담긴 노래들이 제주의 무료한 일상과 찬연한 자연이 빚어낸 열매이기 때문이다.

 

2015년 봄부터 지난겨울까지 발표된 10곡의 싱글을 기반으로, 2곡의 신곡을 얹어 총 12곡이 담겼다. 앨범의 크레디트를 살피며 음악을 듣다 보면 장필순의 삶이 느껴진다. 그를 찾아 제주에 왔던 벗과 가족들이 노래를 선물했다. 제주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노래가 그녀에게 검박하게 찾아왔다. 동경과 설렘, 나른함과 반추의 정서가 낮잠처럼 머문다. 한숨처럼 흐른다. 어쩌면 지난 세기에 청춘이란 단어가 가졌던 낭만과 연민이 잘 숙성되어 변이된 형용사 같은 음악이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가장 개인적인 시적 순간들이, 가장 극적인 풍경으로 머릿속을 맴돌게 한다.

 

나는 이 앨범을 소개하며 굳이 ‘음반’이란 단어를 썼다. 여기에 한 단어를 덧붙여야겠다. 이 앨범은 음반이자 책이다. 약 70페이지에 달하는 부클릿이 그렇다. 장필순이 한 곡 한 곡 직접 쓴 작업 노트가 있고 에세이가 있다. 평론과 인터뷰가 실하다. 한 줄 한 줄 곱씹으며 읽는 가사는 시이며, 공들여 찍은 프로필부터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해맑은 청춘들이 찍은 단체 사진까지 좀체 보기 힘들었던 사진들은 장필순의 연대기다. 그래서 이 앨범은 꼭 음반으로 듣기를 권하고 싶다. 플레이어가 없어 부득이 스트리밍으로 들어야 할지라도 부클릿을 음미하며 삼키길 권한다. <소길花>는 그때 피어난다. LTE가 잡히지 않는 산속의 산책처럼, 액정이 아닌 눈으로 보이고 메모리가 아닌 두뇌에 새겨지는 자연과 삶이 이 앨범 속에 단아하게 앉아 있다. 계절의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