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거처는 어디일까? 대개 음악이 기거하는 장소는 그 음악이 만들어지고 향유되던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전 세계 곳곳의 콘서트홀이 19세기 번성했던 교향악에 최적화된 공간이라면, 20세기 후반 등장한 전자음악이나 일상의 소음을 소재로 한 실험 음악, 사운드 아트나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 같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은 어디를 거처로 삼을 수 있을까?
지난 5월 말 남산자락에 개관한 한 전시공간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라이프, 라이프’가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 전시장으로 들어온 음악가가 낯선 건 아니다. 현대음악을 배우러 독일로 간 백남준이 1963년 부퍼탈에서 연 첫 개인전이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 아니었던가. 갖가지 소리가 해체·재구성된 ‘소리 콜라주’, 우연과 즉흥의 오브제로 변형되는 ‘총체 피아노’, 관객의 적극적인 개입이 요구되는 ‘인터랙티브’ 소리 작업 등으로 전시공간을 뒤덮으며 백남준은 전통적인 음악 관습을 전복하고 새로운 음악의 존재론을 펼쳤다. 4년 전 베를린에서 본 데이비드 보위 전시회도 떠오른다. 2013년부터 5년 동안 전 세계 12개 도시를 순회했던 이 전시회에는 대중문화의 최전선에서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구축해온 아티스트의 공연 실황과 뮤직비디오, 각종 영상 자료, 무대 의상과 세트 디자인, 앨범 아트와 자필가사 등 볼거리가 넘쳐났다. 이때 스피커와 헤드폰을 동반한 시청각적 경험이 중요했음은 물론이다. 이번 사카모토 전시회는 전시장이 음악가의 청각적 상상력을 구현하는 음향 공간으로 변모하며 새로운 음악의 거처로 탈바꿈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전장의 크리스마스> <마지막 황제>의 영화음악 작곡가이자 뉴에이지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청소년기부터 존 케이지나 백남준, 플럭서스 운동에 영향받았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소리를 탐색해온 현대 음악가이기도 하다.
1978년 결성한 3인조 테크노 밴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가 국제적으로 성공하며 1980년대에 배우로, 영화음악가로 대중적 인기를 구가했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전위예술에 매료되었던 젊은 시절의 문제의식에 천착하며 근원적인 소리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실험적인 작품들이 집중 조명되었다. 미디어 아티스트·엔지니어와 함께 만든 설치 작품들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 파동, 어둡고 고요한 공간에 투사되는 독일 전자음악가 알바 노토와의 ‘인센’ 라이브 공연 영상, 가상의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위한 사운드트랙으로 만들었다는 음반 <에이싱크(async)>의 작업 과정, 최근 몇 년간의 일상을 담아낸 다큐멘터리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의 한 장면, 고음질 오디오와 서라운드 스피커로 재생되는 음반 트랙 등. 전시장 곳곳에서 관람객은 사카모토가 들려주는 색다른 형태의 음악 혹은 소리를 체험한다.
이번 전시와 더불어 2017년 앨범 발매 기념 콘서트 실황을 담은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에이싱크>도 개봉했다. 사전 작업된 전자음향, 천장에 매달린 스크린 속의 이미지, 피아노와 여러 타악기와 사물들에서 만들어내는 소리가 어우러졌던 뉴욕의 소규모 콘서트 현장은 서울의 작은 영화관에서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음악과 공연 콘텐츠의 플랫폼이 변하고 있다. 클래식 콘서트나 오페라 영상이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공연 실황이 스트리밍으로 제공되는 시대다. 현장감은 있으되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공연장보다, 편한 시간에 자유롭게 관람하며 문턱이 낮은 영화관이나 전시장이 음악을 즐기는 대안 공간일 수 있을까?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생성되는 소리, 자연과 일상의 소리를 수집해 만드는 음향 콜라주, 미묘한 소리의 뉘앙스 변화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사운드 시스템이 잘 갖춰진 전시장은 음악 경험의 또 다른 장소가 될 수 있을까? 현대음악도 콘서트홀을 벗어나 새로운 거처를 모색한다면 청중과의 접점을 넓힐 수 있을까? 사카모토 전시회를 찾은 수많은 관람객들 속에서 떠오른 질문들이다.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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