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말하기]공간이 주는 진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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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생각꺼리

[몸으로 말하기]공간이 주는 진실의 시간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비트사피엔스>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은 저마다 묵직한 매력을 품고 있다. 쉽게 안을 보여주지 않고 방문객의 애를 태우기도 한다.


가끔은 외부와 내부 공간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겉은 돌로 지어져 고풍스럽고 비라도 촉촉이 내리면 감성을 한껏 돋워주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월의 흔적을 감춘 채 현대식으로 개조한 건물들이 적지 않다. 역사와 전통을 내세운 고색창연한 공연장도 예외는 아니다. 개·보수된 현대감각의 조우는 관객들을 공연장으로 불러들이는 데 손색이 없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국내 200여개의 국공립 공연장이 관객들과 만나지 못하고 있는 언택트 사회를 살다보니, 유학 시절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공간들과 그 공간이 주는 느낌이 요즘들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1994년 당시 파리11구 골목길에 위치한 검은 철문 안으로 예술가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간판을 보니 알쏭달쏭하다. ‘메나지르 드 베르’, 윌리엄 테네시의 희곡 <유리동물원>의 모습을 닮아 있기도 하지만 무엇을 하는 곳인지 여하튼 궁금했다. 궁금하면 두드리라 했던가.


조용히 아침을 맞는 그곳은 낮엔 워크숍, 저녁엔 창작공연이 열리는 장소로,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자유롭게 어우러지는 멀티 예술공간이다. 파리시에서 후원하고 무용 창작이 중심이 되는 공간이지만 다양한 예술가들의 만남과 경험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안무가, 무용수, 배우, 행위예술가 등 파리를 찾는 예술가들이라면 꼭 한번은 들러봐야 할 곳이다. 상업적 스튜디오와는 차별화된 무용인들을 위한 전문무용센터라 할 수 있겠다. 


워크숍 외에 오디션이 진행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유명 안무가의 워크숍은 오디션으로 이어지며, 마지막 날 선별된 무용수들이 신작 작업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다. 오디션에 참가한 댄서들이 이른바 오디션 투어를 하는데, 마치 <미스터 트롯> 참가자들 같다고 해야 할까. 자주 마주치다보면 친분도 쌓이고 정보도 교환하고 국제적 인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도 이곳에서 치열한 오디션을 통과해 프랑스 무용단에서 작업을 함께했다. 한입에 털어넣어도 모자랄 것 같은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보면 어느덧 공간과 하나가 된다.


요즘은 온라인 상영회로 대체되는 공연이라도 감사할 따름이지만, 코로나19로 희생된 많은 예술가에게 관객 없는 공연장은 쓸쓸함 그 자체이다. “경험 많은 몸이 무대 위에서도 진실할 수 있다”고 영국의 DV8 예술감독 로이드 뉴슨은 말했다. 공간을 공유하고 땀으로 연습실을 채우고 무대가 열리고 공연장이 관객으로 채워지는 진실된 시간을 기다려 본다.


<김성한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