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나는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서 태어나 1년이 채 안돼 삼청동으로 이사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전에 이야기했지만 나의 아버지는 공부를 좋아하신 한학자셨다. 돈 버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가끔 화를 내셨지만 “어쩌겠니, 방금 내가 뭐라고 했니?”라며 곧바로 후회하셨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했다. 자퇴 이유를 쓰라는 담임 선생님께 “나는 공부가 싫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공부시간에 몰래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의 매를 맞고 우스운 아이가 되는 게 싫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우시면서 “네 담임 선생님이 나를 찾아 오셨다. 학교에 보내라고 하신다. 학교로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할래요. 다른 일은 하기 싫어요. 부끄럽지 않아요. 자신 있어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정말 한동안 그림만 그렸다. 그때 우리집에서 함께 살던 삼촌께서 “너도 이제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왜 서울을’ 악보
삼촌과 아버지를 따라나섰고 국제극장에서 영화 간판을 그리는 화공의 제자노릇을 했다. 작업실의 천장은 높았고 공간은 넓었다. 극장으로 첫 출근을 할 때 ‘내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을 많이 했지만 적응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화 간판을 그리는 게 내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열흘 만에 그만두었다
삼촌을 따라서 신촌에 있는 어떤 만화출판사에 갔다. 그리고 당시 중앙일보에서 발간하는 잡지 ‘소년중앙’의 부록에 실리는 만화 ‘아톰’을 그리시는 김우영 선생님의 1등 제자가 됐다. 1등 제자란, 제자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빼다칠(만화의 검은색 부분 칠) 풍경 등 만화 속 인물이 놀랄 때 표현하는 펜터치 등을 넘어서 곧바로 연필데생을 하는 제자다. 당시 나는 한 페이지당 얼마씩 받았다. 하지만 이 일도 몇 달 만에 그만두었다.
나는 그림을 누구보다 잘 그린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솟구쳤다.
김우영 선생님은 북가좌동 산동네에 사시는 참 좋은 분으로 내 기억에 진하게 남아 있다. 선생님은 내가 일을 그만두는 것을 많이 섭섭해 하셨다. 선생님과 사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올 때 슬프다는 감정과 희망감, 내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어느새 내가 생각조차 못해 본 곳에 와 있다는 생각 등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과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표현이 잘 안됐지만 어느덧 정이 든 북가좌동 산동네와 선생님, 사회, 다른 사람과의 인연…. 나는 북가좌동 꼭대기 동네에서 내려오는 길에 맞은편 산에 들렀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변화와 내가 사는 곳, 나의 집앞 버스정류장, 그리고 열여덟 살인 나를 품고 있는 서울을 마음속에 그렸다.
분노를 일으키는 독재사회. 나는 독재가 아주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뜻대로 모든 것이 움직여진다면! 사람의 영혼이 잡혀 있다는 것은 내 생각이 있어 봐야 독재자에 의해 깜깜한 속에서의 움직임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항하는 많은 일들, 데모나 그 어떤 것들. 그러나 내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싸움…. 나는 우리 나이로 예순여섯이 됐다.
싱어송라이터 전인권이 LP판을 들고 있다.
내 생각에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하얀 백지를 선물해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복잡한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사회를 향한 이 혼란함을 이겨낼 수 있는 대자연 지성의 백지. 우리는 싸우는 동안 다 잃어버렸다. 이겼다고 해도 갈 길 모르는 중생. 지금의 사회는 끝까지 왔다. 옳아도 옳다고 말할 수 없다. 그야말로 하이에나들이 들끓는 세상. 독재와 싸워 이긴 후에도 잡아채서 엎어치기. 잽싼 방어들.
그래 너를 용서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둬라. 정말 이게 웬일이니?
성철 스님, 감사합니다. 일단은 백지 들고 한동안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모양은 보이지만 제가 아직 모자랍니다. 이렇게 살지는 않겠습니다.
나의 노래 ‘내가 왜 서울’은 2편을 만들 생각이다.
<전인권 싱어송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