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퇴색하는 ‘빌보드 차트’
본문 바로가기

=====지난 칼럼보기=====/임진모 칼럼

갈수록 퇴색하는 ‘빌보드 차트’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음악팬들은 가요보다는 미국과 영국의 팝송을 더 많이 들었다.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신해철 등 강자들이 우글거렸던 1990년대에는 팝과 가요의 시장 지분이 역전되었다고 해도 팝의 위력은 여전했다. 우리 가수뿐 아니라 마이클 볼튼, 마이클 잭슨, 보이즈 투 멘, 에이스 오브 베이스, 머라이어 캐리와 같은 외국 가수들도 음반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니까. 여기에는 “영미 팝은 세계 음악 유행의 첨병과 선봉이므로 우리는 팝을 따라가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 정서가 작용했다. 트렌드를 견인하는 서구 팝을 챙겨야 우리 가요의 발전도 꾀할 수 있다는 사고였다고 할까.

돌이켜보면 빌보드 차트에 등장한 영미 팝은 꽤 배울 게 많았던 것 같다. 음악의 전성기라 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무수한 수작들이 쏟아져 나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빌보드 차트 1위곡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빼어난 대중흡인력, 실험성, 개성을 갖춘 노래들이 백가쟁명하며 치열하게 인기 정상을 겨뤘다. 그래서 어떤 한 곡이 오랫동안 차트 넘버원을 점령하는 것을 보기 어려웠다. 빌보드에 반영된 해외 인기 동향을 주시하면서 우리 음악계는 아티스트만의 독자적 색깔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복적으로 학습했다.

1974년과 1975년에는 각각 한 해에 무려 35곡이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올랐고, 특히 1975년 1월부터 4월까지 12주 동안은 배리 매닐로의 ‘맨디’와 카펜터스의 ‘플리즈 미스터 포스트맨’을 포함, 속사포처럼 매주 1위의 이름이 달라졌다. 존 레넌과 엘튼 존과 같은 슈퍼스타들도 겨우 한 주 1위에 만족해야 했다. 나중에 빌보드 편집장이 된 유명 평론가 티머시 화이트가 당시 상황을 스케치한 한 기고문에 “좋은 곡들이 너무 많아 그 기쁨에 만취한 기분이다. 우리는 신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에 있다!”고 썼던 게 기억난다.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조지 마이클, 필 콜린스, 본 조비 등 레전드들이 즐비했던 1988년에도 자그마치 32곡이 정상을 바통 터치했다. 그랬다가 1990년대 들어 이런 풍조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보이즈 투 멘의 ‘엔드 오브 더 로드’, 스페인의 두 아저씨 로스 델 리오의 ‘마카레나’처럼 10주 이상 1위를 차지하는 장기 독재자들이 등장했다.



무대에서 열창을 하고 있는 본 조비_경향DB



힙합을 비롯한 흑인음악의 강세, 디지털 음원으로의 전환 등 여러 요소들이 얽혀 음악시장이 헝클어지면서 대중적 수작들이 경쟁하는 광경은 뚝 끊겨버렸다. 1994년과 1996년 빌보드 싱글차트 넘버원에 오른 곡은 불과 9곡이었다. 몇몇 곡이 오랫동안 정상을 독점한 탓이었다.

올해도 마크 론슨과 브루노 마스의 공작 ‘업타운 펑크’가 14주간, 위즈 칼리파와 찰리 푸스가 함께한 ‘시 유 어게인’이 12주간 1위를 싹쓸이했다. 두 곡이 한 해 차트의 3분의 2를 지배한 셈이다. 또한 이번주 차트는 유약하면서도 세련된 R&B 음악을 하는 더 위켄드라는 아티스트의 노래 ‘캔트 필 마이 페이스’와 ‘더 힐스’가 1위와 2위를 동시에 점거했다.

이런 원투펀치는 과거 비틀스, 디스코 광풍의 주역 비지스나 누렸던 특혜로 1980~1990년대에는 없었다가 2000년대 들어서 자주 목격되고 있다. 특정 소수 곡에 대한,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인기 쏠림 현상이다.

팝 라디오 진행자 배철수는 ‘좋은 곡의 부재’로 그 이유를 풀이하고 있다. “팬들의 관심도 축 처져 있고 음악은 상업적 패턴에 묶이면서 의당 보여주어야 할 개성과 매혹이 드러나지 않는다. 별로 곡(曲)이 없다!” 재즈평론가 백승호는 이를 확대해 “전에 재능 있는 사람은 오디오업계로 몰렸다. 지금은 똑똑한 젊은이들이 IT 업계로 간다. 옛날에는 음악 쪽에 재능아들이 몰렸지만 요즘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며 음악 쇠퇴의 운명을 거론하기도 한다.

갈수록 퇴색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각의 가수들은 여전히 빌보드로 대변되는 팝의 경향에 매달려 살짝 가공한 작품으로 ‘트렌드세터’임을 으스댄다. 그러니 음악이 신선하지 못하고 모두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시감이 앞선다. 음악이 활기를 찾으려면 이런 상투적 흐름을 엎어버려야 한다. 패턴화한 빌보드와 팝을 넘는 개성의 가수가 출현하기를 염원한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