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학교 다니면서 짜증나는 일 중 하나는 ‘장학사님’이 오실 때다. 교장선생님 이하 학교 전체가 한 달 전부터 법석을 떨며 환경미화를 하고, 모종도 옮겨 심고, 운동장에 돌도 주워 날라야 한다. 교실이며 복도 마룻바닥에 양초를 듬뿍 칠한 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질반질하게 걸레질을 해댔다. 그렇게 ‘꽃단장’을 하고 맞이하는 장학사님 앞에서, 어디 한 번 제대로 숨이라도 쉴 수 있었나. 특히 나 같은 말썽꾸러기에겐 선생님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쏟아지기 일쑤였다. 그러던 김제동, 많이 컸다. 그 장학사님보다 훨씬 ‘높은’ 교육감을 만났다. 지난 24일, 취임 1주년을 앞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집무실을 찾았다. |
곽노현 “사람은 누구나 배우기 좋아하도록 설계돼 있는데, 배우는 것을 고역으로 생각하고 배우는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채 사회에 나오고 있어요. 이것이 공교육이 저지른 가장 큰 죄라고 봐요.” 김제동 “재미있는 학교가 만들어지면 해결되지 않을까요? 좀 더 즐겁고 행복해지는 학교가 되도록 많이 도와주세요. 제가 시민으로서 갖는 바람은 그겁니다.”_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교육감으로서 첫돌을 맞으신 건데, 축하인사보다는 평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무래도 많죠?
“그렇죠. 후회 없을 만큼 최선은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 가지 부족함과 한계도 느껴요. 교육을 바꾼다는 것은 교실 안에서 선생님과 학생이 맺는 관계를 바꾸는 것이죠. 그것을 리드하고 주도할 선생님의 자발성과 열정을 어떻게 지필 것인가가 관건인 것 같아요. 지난 1년간 느낀 것은 선생님이 교육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과도한 짐을 덜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행정업무에 대한 부담 같은 건가요? 학생들과의 친밀감을 가져야 할 시간에 행정업무에 치이는 선생님의 현실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동안 교육청은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는 것을 방해해왔어요. 교육청이 실시하는 각종 연구·시범학교 사업, 각종 경연·경시대회 하는 것이 수도 없이 많아요. 교육청이 일률적으로 제시하고, 공문 내리고, 독촉하고, 결과를 보고받는 식이었지요. 그런데 앞으로는 교장선생님이 중심이 된 학교 공동체가 스스로 찾아서 필요한 일을 하도록 할 계획이에요. 그래서 내년부터는 온갖 사업들을 50% 이상 줄이려고 해요.”
곽 교육감은 선생님들이 위를 바라보지 않고, 아이들을 쳐다보도록 구조를 바꾸겠다고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교장선생님을, 교장선생님은 교육청을 바라봐야 승진이 되는 구조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을까.
“그 구조를 바꾸기 위해 교장 평가지표를 완전히 새로 구성했어요. 교장의 활동 만족도 조사에서 교사, 학부모, 학생이 평가하는 비율을 40%로 높일 겁니다. 교장선생님은 교사와 학부모, 또 공교육의 주인이랄 수 있는 학생의 행복과 성장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지요. 교육청은 학교 속으로, 학교는 선생님 속으로, 선생님은 아이들 속으로 가자는 거죠.”
-권한은 아래로 분산시키고, 결정은 학교주체들이 자율적으로 하는 것을 꿈꾸신다는 거네요.
“그렇죠. 이것은 모든 단계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겁니다. 권한을 나눠주면 새로 받은 권한은 반드시 민주적으로 행사되고 통제되어야 해요. 학교는 민주주의의 체험학습장이고 실천장이거든요. 학교 공동체가 전보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학교는 이런 이상적인 의미에서 거리가 있어요. 교육의 목표는 성찰적인 민주시민을 키우는데 있어요. 우리가 모든 학생을 서울대에 보낼 순 없어도 모든 학생을 민주시민으로 기르는 것은 가능합니다.”
-지금 공교육은 이런 교육을 하고 있지 못하잖아요.
“지금 학교는 보편과 기초는 간데없고 특수만 판치고 있어요. 특별가산점, 특별지원금을 주는 활동에만 매달리거든요. 교육청이나 교과부가 각종 정책사업을 하며 지원금을 주고, 실적을 보고받고, 연구결과를 발표합니다. 형식적이고 관료적이죠. 당연히 학교 입장에서는 돈받고 점수얻는 일에 매달리는 거죠.”
곽 교육감은 각종 특별정책사업 때문에 정작 교육의 본질이 요구하는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게 우리 학교의 현실이라고 했다. 문화예술체육교육,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 권리존중과 같은 교육이 수업시간에 이뤄지지 않고 대신 위로부터의 요구에 부응하는 교육에 아이들이 동원되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래서 연구학교, 시범학교, 중점학교, 거점학교 하는 식의 400여개에 이르는 사업 중 80%를 임기 내에 정리하겠다고 했다.
▲ “교사들 교육 전념하게 사업 50% 이상 줄여 과도한 짐 덜어줄 것”
▲ “어린 시절, 학교에 ‘장학사님’ 오실 때면 학교 전체가 한 달 전부터 법석 떨었는데.” - 김제동
-학교의 자율성을 늘리고 대신 골고루 지원하겠다는 거네요.
“이런 사업을 확 줄이고, 여기 붙어 있는 특별 지원금을 모아서 학교에 골고루 나눠주면 모든 학교가 혜택을 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그렇게 말해요. 지금까지는 교육청이 ‘장악’을 했다면 앞으로는 ‘장학’하자고.”
-일각에선 비판적 시선도 있어요. 학생인권조례 같은 건데, 학생인권만 강조하다가 교권이 무력화되는 것 아니냐고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교권과 학생인권은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선 학생인권을 얘기해볼까요.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사람이 특권층이라면 그 반대는 노예겠지요. 우리 학생들은 어디에 가까울까요? 학생들이 우리가 바라는 책임 있는 인간으로 자라게 하려면 자유와 권리 속에서 책임과 의무를 선택하게 해야죠. 학교가 타율과 통제, 비교와 경쟁이 심해지면 아이들의 인성도 타락하기 쉽습니다. 정당한 교권은 아이들의 권리와 자율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학부모가 교실에 들어와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거나 학생들이 선생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이런 부분에는 정말 단호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학부모가 교실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거친 언행을 보인다면 학교장이 고발하고 사회가 처벌해야 하는 거라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교권보호 조례안을 서울시의회와 협력해 만들겠다는 의향을 밝힌 바 있습니다. 학생들의 교권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이 부분은 체벌로 대체해 왔는데, 체벌이 금지되면서 아이들이 처음 맛보는 자유와 권리를 남용하는 측면도 있죠. 그래서 체계적인 교육과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안 그래도 체벌이 없어져서 교권 침해가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아요. 또 체벌 대신 뭘로 지도하느냐는 분들도 많죠. 특히 진보적 성향의 교육감이 온 뒤에 학부모에 의한 교권 침해 사례가 더 많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무례한 행태를 보인 학부모가 늘어났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고요, 단 일부 학생들이 체벌 금지를 기화로 대들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좀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잘못된 거죠.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발전을 하려면 진통이 따른다고 봐요. 이 진통은 이전에 우리가 소홀했던 결과이기도 하죠.”
-전 선생님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문제아·학습부진아·비행청소년 특별 전담반이니 뭐니 하는데 이런 식의 분류가 더 큰 상처가 되는 것 같아요. 잘못된 행위는 꾸짖어야겠지만, 그 너머에 그럴 수밖에 없게 된 이유도 있겠죠. 그런데 아이들의 마음을 들어주는 곳은 없는 것 같아요.
“100% 공감해요. 저도 학교를 중퇴한 청소년들을 만나보면,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해요. 우리를 나쁜 아이로 보지 말아달라고요. 그런 편견의 시선이 제일 싫다는 거죠. 아이들을 어떤 추상적인 집단의 구성원으로 보는 건데 여기에는 차별적인 시선이 불가피하거든요. 특정 집단의 편견과 단점을 덮어씌우는 거죠. 개별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꽃이 되게 하는 것, 그게 교육적 소통이라고 봐요.”
-제 생각엔 진보교육감, 보수교육감 이렇게 말하는데 이건 아이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해요. 이념과 상관없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묻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면 충분하잖아요.
“저도 진보냐 보수냐 하는 표현이 어색하다는데 동의해요. 교육은 한 세대 후를 길러낸다는 의미에서 진취적이어야 하고, 반면에 전승해야 할 전통적 가치와 토대를 지켜야 한다는 점에선 보수적이어야 하거든요. 그것 모두 교육의 본질이죠. 진보니 보수니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교육 본질에 부합하는 것이냐를 따져야죠. 정호승님의 시 중에서 ‘봄길’이라는 시가 있는데 ‘길이 끝나는 곳에서 스스로 봄길이 되어 간다’는 구절이 있거든요. 지금 한국 교육은 양극단으로 모순에 빠져 있는데 이 상황에서 내가 봄길이 되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진보·보수 따지지 말고 교육 본질에 부합하는 게 어떤 것인지 따져야”
▲ “문제아·학습부진아·비행청소년 특별전담반 분류 자체가 아이들에겐 더 큰 상처가 되는데.” - 김제동
-제가 교육감님께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오락부장이나 체육부장처럼 인기 많은 아이들, 아니면 싸움짱들을 불러서 대화를 나눠 보시는 게 어때요?
“안 그래도 얼마 전 학생 대표들과 질의응답시간을 가진 적이 있어요. 교육의 주인인 학생들에게 그들의 기분과 생각이 어떤지 들어보는 자리였는데 아이들이 그러더라고요. 다음에는 이런 자리에 짱들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저도 트위터에 그 내용을 띄웠어요. 각 학교에서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이번엔 제가 물어볼게요. 제동씨가 대안학교 하고 싶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그 학교는 10분 공부하고 50분 쉬는 것이 특징이라면서요?”
-좀 바뀌었어요. 1분 공부하고 59분 쉬는 걸로. 하하.
“전 그 이야기 듣고 우리도 발상을 바꿔보자고 했어요. 우리가 혁신학교에서 수업시간을 80분, 쉬는 시간도 30분으로 늘리는 식의 실험을 하는데, 그런 실험 말고 수업시간을 줄이는 실험도 하자고요. 아마 시간당 학습효율은 훨씬 높을 것 같은데. 그런 힌트를 줘서 고마워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또 허심탄회하게 인생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도 필요할 것 같고요. 예를 들면 연예인을 꿈꾸는 학생들이 많은데 ‘연예인이 그렇게 꿈꿀 만한 직업은 아니란다’라고 이야기 들려주는 연예인도 있으면 좋겠고. 그걸 DVD로 만들어 낙도에서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서울교육청에서도 유명인사들의 강연을 제작하여 온라인으로 접속해 볼 수 있도록 했어요. 송윤아씨랑 박원순 변호사도 참여하셨어요. 제동씨도 참여해주시면 고맙죠.”
-헉, 이런 뜻하지 않은 곳에서 형수님의 이름을 듣게 되다니…. 형수님이 하셨으면 저도 당연히 해야죠. 그런데 전 결혼하지 않은 여선생님이 많은 학교에서 강의하게 해주시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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