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배우 황정민
본문 바로가기

=====지난 칼럼보기=====/김제동의 똑똑똑

(19) 배우 황정민

배우 황정민(40)의 첫인상은 솔직히 좀 안돼 보이는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스타의 ‘포스’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철역에서, 버스 속에서 늘 만나는 평범한 사내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수년 전 예능프로그램 <야심만만>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를 형이라 부르면서 늘 안부를 묻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된 건 술 때문이었다. 언젠가 속상한 일 때문에 술에 취해 하소연할 상대를 찾다가 KBS 아나운서 황정민 누나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수화기 저편 목소리는 남자였다. 아나운서 황정민이 아닌 배우 황정민. 그날, 황정민은 한 시간 넘게 내 술주정을 받아줬다. 그리고 형이 됐다. 

그의 주연영화 <부당거래>를 보고난 직후 그를 만났다.

 
 


- 영화가 잘되면 진짜 뿌듯하지 않아요? 트위터에서도 반응이 대단하고.

“그러게. VIP 시사회 끝나고 중훈이형(박중훈)이 올려줘서 홍보가 더 많이 됐어. 극장에도 30·40대 남자들, 넥타이 부대가 와 있더라고. 기분 좋더라. 연인들이 와서 팝콘 먹으며 보는 영화가 아닌 것 같아서, 그게 참 좋아. 그런데 ‘트위트’ 그거 굉장히 효과가 있던데?”

- 에이 참, ‘트위트’가 아니고 ‘트위터’예요. 형은 그거 안해요?

“전화기도 바꿔야 하고 귀찮아서….”

- 이번 영화는 어떤 느낌이었어요? 영화마다 느낌이 다르지 않아요?

“글쎄. 영화가 망했으면 민망했겠지. 그런데 난 좀 그래. 영화를 다 찍고 나서 내가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고나서는 왠지 내 것 같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영화가 다 그랬어. 그냥 하얘지는 느낌이랄까? 지금 영화를 보면서 내가 저렇게 했나? 내가 어떻게 했지? 이런 생각을 계속 하게 돼. 하여튼 나와는 먼 느낌이야.”

- <부당거래>는 평범한 내용의 영화는 아니더군요?

“그렇지. 난 영화판에 그런 영화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 영화판이란 게 눈치를 너무 많이 보니까. 아마 <추격자> 이후로 모든 영화가 스릴러였을 거야. 난 그게 너무 짜증이 났지. 보는 사람도 ‘또 스릴러야?’ 하고 지겨울 텐데 하는 사람은 어떻겠느냐고. 난 예술은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늘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너무 싫어. 그래서 <부당거래>를 하게 된 거지. 류승완 감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승범이까지 한다고 하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했지.”

- 영화 찍으러 다닌 게 아니라 술 마시러 가는 기분으로 찍었겠네요.

“그렇지. 해진씨도 그렇고 뭘 해도 워낙 잘하는 사람들이라. 촬영하면서 어쩌구저쩌구 별 말도 없었어. 그저 서로 연기를 탁탁 주고받으면서 좋은 에너지를 얻는, 그런 즐거움을 느꼈던 작품이지. 그런 게 있어. 좋은 배우와 연기할 때 주고받는 희열이랄까? 그런데 가끔 연기하다 보면 상대를 두고서도 마치 큰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다고 할까? 정말 외롭지. 그런 날 우리끼리는 ‘오늘 외로웠어’라는 말을 많이 하지.”

- 배우의 자질이란 뭔가요?

“늘 주장하는 건데 배우는 착해야 해. 날 보면 알잖아.”

- 형이 그 말 해놓고도 웃기지 않아요?

“난 순한 양이야. 나처럼 착한 사람이 어디 있니?”


하긴 그가 ‘순한 양’인 건 나도 동감한다. 딱 한 번 그가 분기탱천해서 고함을 친 적은 있다. 언젠가 형과 뮤지컬배우 박건형, 그리고 나까지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다.

▲ “배우는 착해야 되는데
못된 사람들은 연기를 하면 티가 나”

▲ “진행자도 비슷한 것 같아요. 못된 사람이 말을 하면 표가 나거든요. 어떻게 보면 여우같이 더 잘할 것 같은데…” - 김제동

그날 건너편 테이블의 취객이 우리쪽을 보면서 “쟤는 참 못생겼다”고 했다. 그때 형이 벌떡 일어나서 “왜 우리 제동이가 못생겼냐구요?” 하고 따졌다. 그날 엉겁결에 셋 중에서 내가 ‘가장 못생긴 남자’로 지목됐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다. 그 취객이 “못생겼다”고 지목한 사람이 꼭 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그 취객을 만나면 확인해 보고 싶다.

여하튼 배우 황정민은 참 착한 사람이다. 영화마다 다른 얼굴로, 다른 표정으로 관객들을 놀라게 하지만 그 이면에는 ‘착한 연기자’라는 무기를 숨기고 있다.

“기본적으로 못된 사람들이 있어. 그런 사람들이 착한 역을 하면 티가 나. 그런데 착한 사람이 못된 역할을 하지? 그러면 못된 것만 보인다. 진짜 못된 사람은 착한 역할을 못해. 그만큼 배우는 심성이 고와야 해.”

- 진행자도 비슷한 점이 있어요. 못된 사람이 착한 멘트를 하면 표가 나거든요. 그런데 왜 그럴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못된 사람이 여우같이 다 잘할 것 같은데.

“무대라는 것이 주는 신성함 때문이겠지. 무대는 속일 수가 없어. 암만 치장을 해도 누구나 올라가면 본연의 모습이 다 드러나게 돼 있어. 자기도 잘 알잖아.”

- 무대와 영화는 또 다르지 않은가요?

“그렇지. 내가 작업해본 경험으로는 영화가 더 어려운 것 같아. 어렵다는 건 까딱 잘못하면 100% 들키기 쉽다는 거지.”

- 제 생각엔 뮤지컬이나 연극 같은 무대가 더 들키기 쉬운 것 같은데, 바로 눈앞에서 보이잖아요. 영화는 실수를 해도 정제돼 나올 것 같고.

“영화는 거대한 화면에 얼굴이 클로즈업되잖아. 관객이 배우의 눈을 보면 거짓인지 아닌지가 금세 보이는 거야. 그래서 근육 하나, 눈썹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고 어렵지. 배우의 진심이 없으면 어떻게 관객을 웃기고 울릴 수 있겠어. 그런데 뮤지컬이나 연극은 막이 올라간 뒤 2시간은 내 시간이지. 누가 뭐라든 두 시간은 내 세상이거든. 그 안에서 노는 거지. 똑같은 공연작품이라도 하루하루 색깔이 달라져.”

- 저도 토크콘서트 하면서 그런 것 많이 느꼈어요.

“어떤 날은 희한하게 관객과 죽이 잘 맞아서 가는 날이 있는 반면, 또 어떤 날은 관객들이 다 기자나 평론가 같은 날이 있어. 내가 요즘 찍고 있는 영화가 <모비딕>인데 여기서 기자 역을 맡았거든. 한 신문사에 가서 수습생활을 했는데 기자들 되게 딱딱하더라고. 사회부에도 1주일 정도 있어 봤는데 사회부 기자들은 자기가 형사인 줄 알아. 그래도 일 끝나고 저녁에 함께 갖는 술자리는 참 맑고 재미있더라고.”

- 1년에 영화를 얼마나 찍는 거죠? 굉장히 다작을 하는 것 같은데.

“아냐. 한 1.5편?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지난해 찍은 걸 올해 개봉한 거고, <부당거래>는 올해 찍었고, <모비딕>은 내년까지 촬영할 거야.”

- 그런데도 자주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건 형이 중량감 있는 배우라서 그런 건가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지 뭐. 하하. 한동네에 살면서 자주 만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몰라.”

연극판의 배고픈 배우 황정민이 영화계에서 자리를 잡게 된 작품은 영화 <너는 내 운명>일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너는…>은 배우 황정민에게 분기점이 된 작품이었다. 주류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늘 비주류인 느낌, 연예인이나 스타라는 칭호보다는 인간이나 배우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그런 황정민을 만든 영화였다.

▲ “주류만 찾는 세상에서 비주류 다리 역할… 새 문화형태 만들 것”
▲ “주류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늘 비주류인 느낌. 황정민은 스타라는 칭찬보다 인간이나 배우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 김제동


- 형은 영화를 하면서 정체성의 괴리랄까, 야성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느낌이 있어요? 아니면 연극하면서 고생하는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이 느껴진다든가?

“특별히 없어. 내가 잘나서 잘된 건 아니고 운때가 맞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 돈 생기면 연극하는 후배들한테 가서 술 사줘. 물론 조심스러운 건 분명히 있지. 그래서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내가 필사적으로 지켜온 건 촬영장에 늦지 않게 간다는 거야. 늘 한 시간 전에 가지. 조연출이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묻곤 하는데 이유는 단 하나야. 연기 잘하고 싶어서.”

- 무당 같아요. 접신하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맞아. 나 항상 사우나 가서 목욕하고 가.”

- 하하. 목욕하고 갔는데도 영화에선 늘 꾀죄죄하게 나오던데…. 농담이고요. 앞으로 계획이 뭐예요? 기자 같은 질문이지만.

“배우로서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관객과 만나는 다양한 형태, 특이한 형태의 공연을 해보고 싶어. 영화계에서도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다리 역할을 계속하고 싶고.”

- 남을 위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 그런 일은 중요한 것 같아요.

“최고로 중요하지. 대중들은, 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주류만 찾잖아. 난 그것 보기가 참 불편해. 예술은 주류 때문에 모든 게 움직이는 게 아니야. 밑바닥에 있는 비주류의 사람들도 각자의 역할을 하거든. 내가 영화를 시작하면서 마음먹었던 일을 비로소 내년에 본격적으로 하지. ‘키친 프로젝트’라고. 부엌에서 어머니가 뭐든 만들잖아. 재료도 없는데 맛있는 반찬이 뚝딱 나오고. 그래서 키친이야.”

맹인검객, 농촌 총각, 우체국 말단직원, 순수한 슈퍼맨…. 그가 영화에서 만들어온 이미지와 그가 꿈꾸는 일이 잘 맞아떨어질 듯했다. 우직한 비주류의 누군가가 주류 세상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야말로 사내로서 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 그런데 왜 그걸 해보고 싶은 거예요?

“나도 열심히 해서 지금까지 왔으니까 후배들도 그 길로 이끌고 싶어. 비주류의 실력있는 친구들을 주류로 데려와야지. 미국에 선댄스영화제라고 유명한 영화제가 있어. 로버트 레드퍼드가 만들었지. 칸이나 베니스가 포장된 주류 영화제라면 이건 진짜 선수들, 비주류들이 열정을 갖고 뛰어놀 수 있는 무대야.

로드리게스, 타란티노 등이 여기서 발탁됐지. 하비 케이틀이란 배우가 타란티노라는 신인 감독이 만든 대본을 보고 한눈에 그 재능을 알아봤대. 그래서 나온 게 <저수지의 개들>이지. 멋있잖아. 후배들하고 출연료나 촬영조건, 배급사 같은 거 안 따지고 서로 호주머니 털어서 그런 것들을 만들고 싶어. 우리가 처음 학교에서 영화를 찍을 때처럼.”

- 형은 유난히 그런 쪽에 애착이 많은 것 같아요. 촬영 때 호텔 잡아줘도 스태프들 있는 모텔만 고집한다면서요.

“호텔에서는 야한 영화를 안틀어줘서. 하하. 늘 좋은 것, 좋은 음식, 좋은 잠자리만 찾다보면 몸이 썩어. 진짜 귀한 게 없어지는 거지. 시상식에도 그래서 안가고 싶어. 어떤 작품보다 배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모아지는 게 아주 싫어. 어떤 땐 레드카펫을 팍 찢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는데….”

- 가서 당당하게 한 번 찢어주지 그래요.

“또 말만 그렇게 하잖아. 나 인생 가늘고 길게 사는 연약한 보통사람이야. 우하하.”

형이 임수정과 연기한 <행복>이라는 영화가 기억난다. 그때 형은 사랑하던 여자를 배반하는 죽이고 싶도록 얄미운 역할을 맡았다. 오죽했으면 내가 서울 올라와서 처음 산 코트가 영화 속 형의 코트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입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그 코트는 나중에 형 차지가 됐다. 다시 추운 겨울이다. “정민형, 영화도 잘됐는데 코트나 한 벌 사줘요. 참한 여자 소개시켜줄 주변머리는 못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