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군대 전역을 앞두고 대학원 복학을 위해 캠퍼스를 찾았던 필자는 바뀌어버린 세상의 놀라운 일상, 두 사실에 접하게 된다. 한 가지는 ‘아래아한글 1.5’라는 소프트웨어가 손 글씨로 리포트를 내고 타자기로 논문을 쓰던 대학의 문화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에서 당시로서는 생소한 개인컴퓨터로 리포트를 써내려갔고, 도트프린터는 그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방금 썼던 리포트를 실시간으로 토해내었다.
그만큼 더 필자를 놀라게 했던 사실은 대한민국의 평일 저녁을 독점해버린 <질투>라는 드라마였다. 당시 이 드라마는 ‘최진실’이라는 신인 여배우를 강렬하게 각인시켰는데, 그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새로운 드라마의 형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의 한국 드라마는 전형적으로 평균 3대에 걸친 가족관계가 또 다른 가족들과의 애증과 오해로 뒤섞여 눈물의 플롯을 익숙하게 재생시키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질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여주(여자주인공을 요즘은 이렇게 부른다)와 남주(남자주인공도 이렇게 부른다), 그리고 그들의 가까운 친구들, 그리고는 회사 동료들 이외에 구차한 설명과 소개도 없다. 추가적인 가족도 등장하지 않고, 당시로서는 일상화되기 시작한 팩시밀리 통신과 PC통신의 초창기 버전이 중요한 순간에 소통의 기제로 잠깐씩 보여질 뿐이다. 중요한 건 여주와 남주의 로맨스였고, 그들의 사랑이야기 역시 다른 가족과의 역설적인 플롯이 아닌 자신들만의 고민과 선택에서 시작과 끝이 결정된다. 새로운 ‘장르’였다. 일본드라마에서 보여졌던 일명 ‘트렌디 드라마’의 정형화된 장르가 국내에 유입된 것이다. 새로운 장르는 그 이후 밀리언셀러 드라마를 계속 양산해낸다. <별은 내가슴에> <사랑을 그대 품안에> <토마토> 등에 이어 <파리의 연인>으로 시작되는 연인시리즈와 <대장금> <이산> 등 사극에서조차 이러한 장르가 여전히 안정적인 시청률 성공의 공식으로 적용되고 있다.
tvN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한 장면
실제, 트렌디 드라마는 1980년대부터 일본을 중심으로 경제와 소비의 경쟁적 세대로 등장한 2030 젊은 여성인 OL(Office Lady)그룹을 대상으로 그들만의 변화된 일상과 특화된 고민을 형상화한 맞춤형 장르로 그 실험이 시작된다. 마치 월트디즈니가 신화적 요소를 가미해 반복적으로 유럽의 공주시리즈 동화에 적용시킨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일본식 모방과 부분 혁신으로 리메이크한 ‘캔디 콤플렉스’로 전략화한 시도였다. 여주는 항상 혼자만의 열정으로 자신의 일을 꿋꿋하게 처리해간다. 또 늘 괴롭히고 가로막는 기득권층의 사회적 압력과 로열패밀리의 지질한 공격은 곳곳에 배치된 키다리아저씨(캔디의 알버트 아저씨 캐릭터)와 로맨스의 왕자님들이 사이다처럼 해결해준다. 이런 전형적 플롯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긴장과 만족을 더해준다. <시크릿 가든>과 <상속자들>에 이어, 지난해 <태양의 후예>와 <도깨비>도 그랬고, 현재 방영되는 <김비서가 왜 그럴까>와 <미스터 선샤인>도 그러한 장르에서 별로 이탈해 있지 않다.
그런데, 1990년대 일본에서 시작되고 2000년 말 이후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만화장르가 2016년을 전후해서 새로운 웹툰장르로 특화되고 트렌디 드라마와 동일한 여성소비층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최근 유료경제와 캐릭터 비즈니스의 잔잔한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야오이(やおい)물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BL(Boys Love, 남성동성애 만화)이 한국만의 여성장르로 특화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작품을 여성 만화작가와 여성 시나리오작가가 창작하고, 여성 독자들이 중독적으로 팬덤을 형성하며 유료결제하고 지지를 보낸다. 작가는 스타덤에 오르고 출판을 위한 크라우드펀딩에는 수억원이 모이며, 작가 콘서트에는 아이돌 못지않은 응원과 환호가 더해진다. 작품을 캐릭터로 한 굿즈(goods, 캐릭터상품)도 지속적으로 판매되고 언더그라운드 마켓에서는 수집광도 마니아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실험적 장르소비가 이제 시장을 움직이는 공식으로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마니아층의 한정적 현상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그 영역의 확장성이 실물경제의 중요한 방향으로 이미 검증되기 시작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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