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완의 문화로 내일만들기]실재하는 항일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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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블라블라

[한창완의 문화로 내일만들기]실재하는 항일 콘텐츠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행위, 즉 명상은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아무런 왜곡 없는 순수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의미의 한자만을 본다면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세상을 찾는 생각의 실천이 명상이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봤다.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답답할 정도의 지난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다. 어릴 때부터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는 수업시간과 교과서, 역사책,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들어보았지만, 이처럼 아픈 이야기인 줄은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더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그걸 제대로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이 더 아프고 미안했다. 특히 주연 여배우의 10대 표정으로 느껴지는 밝은 표정이 어두운 8호실 감방에서 보여질 때는 더 숨이 막혔다. 영화가 끝난 뒤 한참 동안 다시 숨을 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항거>는 그렇게 흑백영상과 어두움으로 역사의 명상을 하게 한 작품이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한 장면.


1995년 5월9일자 영화전문지 ‘씨네21’의 창간 다음호에서는 이런 특집이 표지기획으로 실렸다. ‘남벌 : 이현세 만화의 대일본선전포고.’ 당시 단행본으로 <공포의 외인구단> 이후 이현세 만화의 대중성을 다시 불러일으킨 문제작이 <남벌>이었다. 동남아시아의 석유자원을 둘러싼 일본의 패권주의가 전쟁을 일으키며 한국을 압박하고, 결국 핵무기를 개발한 북한과 남한의 연합군이 일본열도를 폭격하여 일본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낸다는 이야기가 <남벌>의 통쾌하면서도 웅장한 아우라였다.


그 마지막 권에서 일본이 서명해야만 했던 문서의 내용은 지금 다시 읽어도 새롭다. ‘과거 한·일 간에 맺었던 한일조약을 전면 폐기하고 새 조약을 만들며, 과거 한반도 침략행위에 대한 철저하고도 명백한 공식사과문을 천황의 이름으로 명문화한다.’ ‘종군위안부를 조직했던 배후를 철저 색출하고 그 명단을 통보하고 피해자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합리적인 배상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국모였던 명성황후를 시해한 배후를 철저 색출하고, 당시 시해자의 명단 및 그 후손의 명단을 한국 측에 통보하고 이를 일본 교과서에 명문화한다.’ ‘지난 과거에 한국으로부터 수탈해간 문화재를 전면 반환한다.’ ‘독도와 그 반경 200해리를 완전한 한국영토로 인정하고 쓰시마섬에 한국 자유무역구와 한국인 영주도시를 만들며, 일체의 관세를 폐지한다.’ ‘방어적 개념 외의 자위대를 축소하고, 일년에 한 번씩 한국 측의 공식 사찰을 받는다.’ 만화적 상상력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역사의 아픈 문제점들을 완전히 해결해내는 카타르시스를 준다. 하지만 아직도 단 한 가지 해결된 것이 없다는 점에서 실재는 더 미안하고 죄스럽다. 우리에게 3월은 매번 그러한데, 이제 100년이 되었다는 것이 큰 숙제로 다가온다.


최근 교과서에 근현대사 내용이 세밀해지면서 일제강점기 때 영화와 그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상영되었던 <동주> <밀정>; <박열> 등은 <미스터 선샤인> 등의 드라마와 함께 역사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었다. 1980년대에는 <독도는 우리땅> 가수 정광태의 히트곡이 연일 불려지다가도 갑자기 노래가 들리지 않고 가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루머와 함께 반일 및 항일의 콘텐츠가 제한적으로 통제된다는 믿기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콘텐츠가 제작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풍문으로 들리기도 했다. 


이제는 보다 다양한 콘텐츠가 지나간 그 시절의 아픈 역사를 살려내야 한다. 그래서 잊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100년이 지나면서 철들어가는 생각이다. 만화 <남벌>도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한다. 마지막 서명되는 항복문서의 그 문장들을 영화의 내레이션으로 듣고 싶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