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송강호, 최민식, 이병헌, 장동건, 김윤석, 현빈, 유해진, 송중기, 황정민, 소지섭, 조인성, 정우성, 류준열, 박서준, 강하늘, 한석규, 김래원, 이성민, 조진웅, 김성균, 정우, 이선균, 안재홍, 김명민, 변요한, 설경구, 임시완, 이정재, 여진구, 김수현, 손현주, 고수, 김주혁, 박성웅, 박희순, 이종석, 박해일, 김남길, 오달수, 김무열, 유재명, 정웅인, 신성록, 이경영, 이경영, 그리고 또 이경영.
2017년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남자 배우 리스트다. 조만간 개봉할 영화들까지 생각한다면 여기에 유지태, 하정우, 차태현, 주지훈, 마동석, 윤계상, 배성우 등이 더 추가된다. 자, 그렇다면. 여자 배우는 몇 명이나 있었을까?
2000년 이후 한국영화에서 남성은 과대 재현되고 여성은 상징적으로 소멸되어 온 지 어언 15년이 흘렀다. 그리고 올 한 해, 이 이상은 더 만들 수도 없겠다 싶을 만큼 비슷비슷한 남성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남자들이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격렬한 연대를 하고 이상한 싸움을 하며 여자는 한 명 끼워줄까 말까 하는 영화 장르는?”이라는 질문에 “한국영화”라고 대답하는 농담이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화제가 되었을 정도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틸 이미지
이런 와중에 놀라운 영화 한 편이 극장가를 찾아왔다. <아이 캔 스피크>다.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나옥분 여사가 공무원 박민재에게 영어를 배워 미 하원 청문회에서 증언을 하게 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위안부’ 피해자를 그저 피해의 자리에 가두지 않고 스스로 목소리를 낸 국제정치의 행위자로서 그린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소개된 대중 ‘위안부’ 서사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아이 캔 스피크>는 진지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따뜻한 휴먼드라마와 유쾌한 코미디 속에 녹여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게 이 영화가 웃음과 눈물을 넘나들면서 대중성 안에서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나문희라는 위대한 배우 덕분이다.
그의 연기는 굳은살이 박인 연기다. 한 분야의 장인이 오랜 세월 기술을 갈고 닦다보면 내공이 발산되는 익숙한 길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문희의 연기는 그런 연기다. 그래서 그의 연기는 일견 익숙하다.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알고, 그가 입을 삐죽거리는 모습을 쉽게 그려볼 수 있으며, 그의 선한 눈이 아래로 처지면서 눈물을 머금을 때의 먹먹함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반복의 순간에도 이전의 연기와 전혀 똑같지 않다. 인물을 자기 자신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옥분 여사는 나문희이면서, 곁을 살피는 가슴 넓은 할머니이자, 역사 앞에 선 영웅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반짝거리는 순간은 카메라가 나문희에게 사로잡혀 깊은 호흡을 들이쉬는 그 시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제훈이라는 특별함이 영화에 빛을 더하기 때문이다.
이제훈은 ‘코믹 휴먼드라마’라는 장르에 적절한 잘 계산된 연기로, 인이 박인 거장의 흐르는 듯한 연기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해낸다. 최근 15년간 <밀양>(2007)의 송강호와 <비밀은 없다>(2016)의 김주혁 정도가 아니라면 여자 주연 배우와 이처럼 훌륭한 앙상블을 만들어낸 남자 배우를 찾기란 쉽지 않다. 모두가 잔뜩 부풀어 오른 상태로 “나야 나”를 외치는 남성영화 최전성기에, 몸을 살짝 웅크릴 줄 아는 이제훈은 확실히 주목할 만한 배우다.
<파수꾼>(2011)에서 <아이 캔 스피크>에 이르기까지. 이제훈은 남자들만의 거친 세계에 집중해 온 ‘한국형 필름 누아르’에 출연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가 올해 내놓은 영화는 <아이 캔 스피크>와 식민지 조선의 아나키스트를 그린 <박열>이었다. <박열> 역시 꽤 인상적인 여성 인물인 가네코 후미코(최서희 분)를 선보였다. 한국영화의 ‘영화적 다양성’을 두껍게 만들어온 명민한 배우의 다음 행보가 사뭇 궁금해진다.
긴 추석 연휴를 보내실 독자들께 극장행을 권한다. 어떤 위대함과 어떤 특별함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것이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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