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 왓슨의 <미녀와 야수>가 개봉했다. 책을 읽고, 질문을 던지는 여성이자,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여성인 ‘벨’. 그는 대중문화로 스며들어간 페미니즘 제2물결의 영향 아래에서 1980년대 말 등장한 2세대 디즈니 공주였다. 물론 “진정한 미녀라면 짐승을 ‘인간’으로 만들어 결혼에 성공해야 한다”는 20세기 판본의 평강공주 스토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캐릭터를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에마 왓슨이 연기했다. 이는 ‘셀렙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왓슨은 2014년 유엔에서 ‘HeforShe’ 연설을 했고, 그에 걸맞은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유명인이 페미니즘 운동의 아이콘이 되는 것을 ‘셀렙 페미니즘’이라고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말한 패트리샤 아퀘트의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소감, 여성영화를 만들기 위한 리즈 위더스푼의 영화사 설립, 세계여성공동 행진에서의 애슐리 주드의 연설 등은 이런 셀렙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예로 언급된다.
영화 <미녀와 야수> 스틸 이미지
다만 셀렙 페미니즘은 때때로 선언의 형태에 그치기도 해서, 이것이 과연 현실 운동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계속되었다. 특히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밝힌 왓슨의 차기작이 <미녀와 야수>임이 알려졌을 때, 많은 이들이 여성에 대한 정형을 생산해 온 디즈니 작품에서 그가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소식은 대중을 설레게 했다. 왓슨은 촬영 당시 “여성의 행동과 몸을 제한하는 코르셋은 벨의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코르셋 착용을 거부하고, 벨을 ‘과학자’로 그리자고 제안해 캐릭터 설정에도 기여한다. “벨이 만든 세탁기는 그로 하여금 책을 읽고 동네 여자 아이에게 글을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기계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숴버린다.” 왓슨의 설명이다.
물론 앤젤리나 졸리의 <말레피센트>가 기대를 부추긴 면도 있다. 디즈니는 소재 고갈을 극복하고 안전한 흥행을 위해 고전 애니메이션을 실사판으로 리메이크하기 시작했는데, <신데렐라> <말레피센트> <정글북> 등이 그 결과물이다. 그중 <말레피센트>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마녀를 주인공으로 만들고, 그에게 역사와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였다.
여기서 디즈니는 이성애 관계에 매몰되어 있던 ‘공주’를 구해내 여성들 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렇다면 <미녀와 야수>는 어땠을까? 이 오래된 이야기를 재해석해서 21세기의 ‘소녀’들에게 다른 모델을 보여주고자 했던 왓슨의 의지는 높이 살 만하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 셀러브리티’로서 고군분투하는 왓슨의 삶이 벨과 겹쳐졌고, 그가 <라라랜드>가 아닌 <미녀와 야수>를 선택한 이유 역시 명백해 보였다. 하지만 이 작품을 페미니즘 영화로 평가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벨은 용감하고 따뜻하고 정의롭고 현명할 뿐만 아니라 과학을 이해하는 신여성이지만, 홀로 고고하고 특출하며 아름답다. 그리고 그렇게 벨을 빛나게 하기 위해 다른 여성들의 재현은 더욱 저열해진다. 그리하여 벨은 야수를 왕자로 변신시키는 마술을 행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 혼자서만 빛나는 벨(왓슨)은 셀렙 페미니즘이 1인 영웅주의로 귀결될 때 벌어질 참담한 결과를 예시한다. 페미니즘은 나 홀로 돋보이라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그저 액세서리일 뿐이다.
페미니즘은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마법의 성에서 일하는 이들의 동료애가 세밀하게 묘사되었던 반면, 실사판에서는 그들끼리의 커플링과 이성애 로맨스가 강조되는 것은 같은 의미에서 실망스럽다.
<말레피센트>에서 <주토피아>, 그리고 <모아나>까지. 최근 디즈니의 작품세계는 계속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미녀와 야수>에서는 갑자기 1990년대로 회귀해버린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이 작품이 중요한 것은 역시 왓슨의 행보 덕분일 터다. 왓슨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시네마 블라블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승찬의 우회도로]칸영화제, VR, 난민 (0) | 2017.05.31 |
---|---|
[기고]영혼 잃고 껍데기만 남은 ‘공각기동대’ (0) | 2017.04.28 |
[백승찬의 우회도로]예뻐야 해. 뭐든지. 예쁜 게 좋아 (0) | 2017.03.08 |
[백승찬의 우회도로]청룽은 어디에 있나 (0) | 2017.02.08 |
[문화중독자의 야간비행]좋은 놈, 나쁜 놈, 애매한 놈 (0) | 2017.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