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극장을 뛰쳐나간 ‘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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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블라블라

[세상읽기]극장을 뛰쳐나간 ‘옥자’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가 국내 개봉을 앞두고 영화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거대 기형동물과 산골 소녀의 우정을 다룬 영화의 설정도 파격적이지만, 영화 상영 방식은 더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옥자>의 국내 배급사인 뉴(New)는 이 영화를 극장 스크린과 온라인 스크린에 동시 개봉한다고 발표했다. 스크린의 전통적인 상영 질서가 혼란에 빠졌다. 더욱이 한국을 대표하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이기에 그 파장의 강도는 깊고 넓다. <옥자>의 진보적 내러티브는 영화 상영의 진보적 테크놀로지 논란에 압도당해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영화 플랫폼의 패러다임이 순식간에 바뀔지도 모르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이른바 <옥자> 스캔들은 칸 영화제 때부터 감지되었다. 프랑스 극장협회는 <옥자>의 투자자본과 상영방식이 전통적인 극장의 생태계를 무너뜨릴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칸 영화제 기간에 옥자의 상영에 반대 성명을 내고, 보이콧 운동을 벌였다. <옥자>의 제작비를 전액 부담한 미국의 온라인 스트리밍 업체인 넷플릭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사이트를 통해 전 세계 190개국에 서비스하겠다고 발표했다. <옥자>의 극장 스크린과 온라인 스크린 동시 개봉은 영화의 미래, 스크린의 운명을 가늠하는 중대 사건이 되었다.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스크린의 운명은 미로 속에 길을 잃고 있다. 당장 국내 스크린 점유율 40%에 육박하는 최대 멀티플렉스 CGV가 <옥자>의 극장 상영을 거부했다. 극장 생태계를 교란시킨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작 극장 생태계를 교란시킨 것은 CGV가 아니었던가? 영화 배급과 상영을 겸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려온 CGV가 과연 극장 생태계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한다. CGV의 반발은 스크린 독점을 견지하려는 자사 이기주의로 비치면서, 오히려 관객을 위한 서비스 선택권의 확대라는 넷플릭스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한 꼴이 되었다. 넷플릭스의 <옥자> 동시 개봉 선언은 스크린 민주주의의 시작인가? 아니면 또 다른 스크린 독과점의 시작인가?

 

혹자는 영화가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개봉되면 전통적인 극장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넷플릭스 때문에 극장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은 음원 때문에 음반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과 비슷하다. 극장에서 ‘영화 보기’라는 문화 정서가 기술의 진보에 의해 소멸되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이번 논란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극장이 갖는 문화공간의 특이성 때문일 것이다. 극장은 단지 영화만 보러 가는 곳은 아니다.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행복한 데이트도 즐기는 여가생활의 가장 중요한 플랫폼이 극장이다. 바로 이 점이 극장이 온라인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근거이다. 음원시장 때문에 동네 레코드 가게가 소멸한 것에 비하면 극장은 그나마 복합적인 문화공간의 기능을 잘 살려 버틸 수 있었다.

 

<옥자>의 스크린 논쟁의 핵심은 문화와 테크놀로지, 영화기술의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스크린 독과점에 있다. CGV는 동시 개봉에 따른 극장 관객의 이탈을 차단하고자 초강수를 두었고, 넷플릭스는 관객 선택권을 명분으로 스크린의 새로운 독점권을 행사하고자 한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CGV냐, 넷플릭스냐가 아니라 이번 사태를 계기로 스크린이 얼마나 다원화되고 민주화되는가이다. 어떤 점에서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스크린 개봉의 시대가 지금의 영화 배급과 상영의 수직계열화를 해소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영화 플랫폼의 다원화로 관객의 확대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스크린은 영화 상영의 다양성을 가져올 수 있다. 단 영화 상영과 배급의 수직계열화가 해소될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배급·상영의 겸업이 유지되는 한, 스크린 종 다양성은 온라인 스크린의 시대가 와도 실현이 불가능하다. 극장 스크린은 맞고, 온라인 스크린은 틀렸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은 영화 기술의 진화를 막을 수 없다. 스크린의 운명은 CGV냐, 넷플릭스냐가 아니라 독점이냐, 다양성이냐에 달렸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