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찬의 우회도로]한국인 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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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블라블라

[백승찬의 우회도로]한국인 남자친구

해외 체류 경험이 많은 친구에게 오래전 들은 이야기다. 한국 남자가 해외에서 여자 친구를 사귀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생기거나, 셀 수 없을 만큼 돈이 많거나, 충격적으로 특이한 캐릭터이거나. 그 어느 조건도 갖추지 못한 채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연애의 자유무역시장이 열린다면 경쟁력 약한 한국 남자는 순식간에 도태될지도 모른다. 비교적 폐쇄적인 국내 시장에서 연애 상대를 물색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28일 개봉하는 영화 <지랄발광 17세>는 미국의 17세 소녀 네이딘 이야기다. 원제 <The Edge of Seventeen>은 ‘17세가 지날 무렵’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극중 네이딘의 행동을 보면 번역 제목도 그럴듯하다. 아버지가 몇 년 전 갑자기 돌아가신 뒤부터 네이딘의 삶은 어긋났다. 어머니는 일하느라, 새 사랑을 찾느라 바쁘고 잘생기고 인기 많은 오빠 대리언은 괜히 얄밉다. 네이딘의 유일한 친구는 선량하고 아름다운 크리스타다. 그런데 크리스타가 대리언과 사귀기 시작하자, 네이딘은 하나뿐인 친구마저 오빠에게 빼앗긴 듯한 마음에 절교를 선언한다.

 

영화 <지랄발광 17세> 메인 포스터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소녀가 된 네이딘은 좌충우돌한다. 그런 네이딘 주변에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난다. 백인 소년 닉은 우수 어린 눈빛의 반항아다. 네이딘은 닉에게 빠져들지만, 꿈에 그리던 ‘왕자님’이 아니라는 점을 깨우친다. 반면 수업 시간의 옆자리엔 어윈이라는 한국계 소년이 있다. 어윈은 첫눈에 반할 만한 소년은 아니지만, 부드럽고 다정하며 사려깊다. 오해에 따른 잘못을 사과할 줄 알고, 상대의 마음 방향에 자신을 맞출 줄 안다. 기발한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마음을 고백할 정도로 낭만적이고 창의적인 면모도 있다.

 

어윈 배역이 인상적인 것은 그 인종적 측면 때문이다. 헤이든 제토라는 중국계 캐나다 배우가 연기한 어윈은 아시아 남자도 연애 상대로 ‘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시아 남우는 대체로 조연이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의 좀스럽고 못생긴 일본인 집주인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2010년 종영한 인기 드라마 <로스트>에서도 한국 남자는 무인도에 조난당한 아내에게 옷차림을 단정히 하라고 닦달할 정도로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영화 속 아시아 남자들은 연애 상대는커녕 차이나타운을 주름잡는 잔인한 악당이거나, 흑인 동네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면서도 흑인을 경멸하는 인종주의자였다. 그러나 <지랄발광 17세>의 한국계 미국인은 슈퍼마켓이나 세탁소를 운영하지 않고, 돈밖에 모르는 구두쇠도 아니며, 비뚤어진 교육열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인종적 특성에 대한 쉬운 범주화, 스테레오타입을 넘어선다.

 

인종의 스테레오타입이 깨진 것은 메이저 스튜디오 소니의 제작자들이 특별히 진보적이거나 모험적이어서가 아니다. 인종적 다양성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식이 바뀌었고, 이를 영화에 반영하라는 관객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소셜미디어에서는 ‘존 조 놀이’가 유행했다. 소설, 만화 원작의 유색인종 캐릭터를 영화에선 백인으로 바꾸는 할리우드의 관습, 일명 ‘화이트워싱’에 대한 반발이었다. 미국인들은 <어벤져스> <미 비포 유> 같은 영화 포스터에 한국계 미국 배우인 존 조의 얼굴을 합성하며 영화 속 배역의 인종 다양성을 재치 있게 요구했다.

 

인종뿐 아니다. 10년 만에 나온 스타워즈 시리즈의 신작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서 제다이의 포스와 광선검을 이어받은 이는 여성이었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007 제임스 본드 역에서 하차할 뜻을 밝히자 뒤를 이을 배우들이 물망에 올랐는데, 많은 팬들은 <엑스파일>의 질리언 앤더슨이 ‘제인 본드’가 돼야 한다며 합성 포스터를 만들었다.

 

물론 모든 범주화가 문제는 아니다. 범주화는 인간 인식의 기본이다. 인간이 털이 길거나 짧고, 주둥이가 뭉툭하거나 튀어나오고, 덩치가 크거나 작은 개를 모두 ‘개’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고도의 범주화 능력 때문이다. 덕분에 3살 아이도 다양한 개를 ‘개’로 알아본다. 하지만 최근까지 인공지능은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개와 고양이의 변이가 너무나 다양하기에, ‘개’ ‘고양이’의 경계를 어디에 그려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은 기본일 뿐이다. 인공지능이 못하는 범주화를 할 줄 안다고 만족할 때가 아니다. 범주를 넘어서 인식하기 위해 노력하고, 내 안의 스테레오타입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여자는 원래 그렇다” “그 지역 사람들은 다들 그렇다”는 말은 없다. 상상은 자유지만, 그 상상이 꽉 막힌 인식의 틀 안에서 빚어진 것일 수 있음은 알아야 한다. 세상은 내 좁은 인식의 틀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