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반문화, 사이키델릭 록의 등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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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반문화, 사이키델릭 록의 등장(3)

도어즈. 밴드도 그랬지만, 특히 짐 모리슨은 사이키델릭 록을 대표하는 페르소나였다.

그렇지만 당대 로스앤젤레스의 사이키델리아를 대표했던 것은 역시 짐 모리슨(Jim Morrison)이라는 걸출한 보컬리스트를 보유했던 도어즈(the Doors)일 것이다.

(음악 틀어 주는 바들 중 ‘도어즈’ 라는 이름의 업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자. 내가 술 많이 먹는다는 얘기가 아님, 어흠)앨더스 헉슬리(Alders Huxley)의 알칼로이드 흥분제에 대한 책의 서문에 수록되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 ‘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 에서 이름을 딴 것이었으니, 블레이크의 구절이지만 대충 사이키델릭과도 어울리는 이름이었던 셈이다. 특이하게도 도어즈는 베이시스트가 없는 밴드였으나, 모리슨의 카리스마적(달리 말하면, 정말 약 먹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목소리라는 뜻이다)인 보컬과 로비 크리거(Robby Krieger)의 블루지한 기타 연주, 레이 만자렉(Ray Manzarek)의 복고적이면서도 환각적인 오르간 연주는 다른 밴드들과는 구별되는 퇴폐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도어즈는 안하무인적이고 거친 스테이지 매너로도 유명했다. 특히나 짐 모리슨은 무대 위에서 성행위를 흉내내거나 동물 학대 등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수준을 넘어선 스테이지 매너를 보여주었다(오죽했으면 코네티컷주에서는 모리슨을 외설행위로 유죄를 인정했을 정도. 밴드의 데뷔작의 ‘The End’ 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도 이 쯤 되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어찌 보면 로큰롤의 시대 이후, 로큰롤 영웅의 신화를 재현했던 것은 아무래도 짐 모리슨일 것이다. 1972년 짐 모리슨이 약물과용으로 사망하기까지 도어즈는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을 꿈꾸던 젋은이들의 ‘컬트’ 로서 활동을 이어 나갔다.

(물론 모리슨 사후에도 밴드는 활동을 했지만, 모리슨이 없는 도어즈를 상상하기란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The Doors - Light My Fire


프랭크 자파(Frank Zappa)의 경우는 좀 독특하다. 1993년에 사망하기까지 거의 1년에 3장 가량의 앨범을 낼 정도로 정력적인 뮤지션이었던 자파는 흑인음악적 전통 외에도 스트라빈스키나 베베른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84년에는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와의 협연 앨범인 “Boulez Conducts Zappa :  The Perfect Stranger” 를 발매했을 정도이다. 게다가 날카로운 유머(B급문화적인 이미지도 물론이다)를 앨범에 꾸준히 섞어 온 자파는 사이키델릭 록의 시대의 ‘광적인 절충주의’ 를 가장 충실하게 실천했던 뮤지션이었을 것이다.

거의 사이키델릭 풍의 오라토리오라 할 만한 “Absolutely Free”, 현대음악풍의 오케스트라 앨범인 “Lumpy Gravy”(말이 오케스트라지 거의 무조음악이다, 유의할 것) 나, 앨범 커버부터 풍자로 넘치는 “We're In It For The Money”(이 앨범에서 자파는 이제 사이키델릭 문화까지 씹기 시작한다), 재즈록 풍의 “Hot Rats” 등 그의 음악은 매우 폭 넓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에인슬리 던바(Aynsley Dunbar)나 스티브 바이(Steve Vai), 테리 보지오(Terry Bozzio), 장 뤽 퐁티(Jean Lun-Ponty) 등의 뮤지션들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사진은 “We're In It For The Money” 앨범 커버. 비틀즈 생각이 나지 않는가?)



Frank Zappa - Cosmik Debris. 중간의 블루지한 기타 솔로는 Steve Vai의 연주이다

동네도 틀리고 음악도 틀리지만, 뉴욕에는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가 존재했다.

웨스트코스트의 사이키델릭은 물론 앞서 말한 바 같이 다양한 성향들을 같이 지니고 있었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히피들의 음악이어서 그랬는지 로맨틱한 면모를 분명 가지고 있었다면, 이들은 뉴욕식의 ‘냉소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뭐 요새 유행하는 말로, ‘차도남’ 스타일로. (여성 멤버도 있기는 하다만 어쨌든 뉴요커들 아닌가)

우리에게는 아마도 영화 “접속” 에 삽입되었던 ‘Pale Blue Eyes’ 가 제일 유명하겠지만, 사실 그런 서정성 넘치는 곡들을 생각하고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접한다면 꽤나 놀랄 것이다. 시인 지망생이었던 루 리드(Lou Reed)와 현대음악에 대한 조예를 가지고 있었던 스털링 모리슨(Sterling Morrison), 루 리드와 함께 밴드의 기둥이었던 존 케일(John Cale)이 만나 결성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히피의 전성기에 비트족의 면모를 간직하고 이를 음악으로 표현하였고, 당연히 음악은 히피들의 순진성에 대한 비트족의 비아냥과 같은 면모를 보였다. 밴드 이름 자체가 마이클 리의 사도-마조히즘적 소설의 제목인 것처럼 이들의 음악도 그런 특징을 보인 탓에(예를 들어 ‘Venus in Furs’) 클럽들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이들을 발굴한 것이 팝 아트의 기수였던 앤디 워홀(Andy Warhol)이었다. 워홀의 추천에 따라, 독일 출신 모델이었던 니코(Nico)가 합류하여 나온 밴드의 데뷔작(보통 ‘바나나 앨범’ 으로 알려져 있는)은 팝 음악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작품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히피의 시대에 이런 냉소적이고 퇴폐적인 앨범은 먹히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바나나 앨범은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의 안티테제라는 평이 있었을 정도)덕분에 이 앨범은 무려 앤디 워홀의 후광을 업고도 상업적으로는 대실패를 거두었다. 물론 밴드의 다른 앨범도 상업적으로는 실패였고(밴드 이름부터가 언더그라운드라니...) 덕분에 그 활동은 곧 끝장나 버렸지만, 당시의 사이키델릭 록과는 달리 소외나 고통, 좌절과 같은 정서를 표현했던 이들의 음악은 프로토-펑크와 같이 평가되고, 이후의 음악적 조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된다. 흔히 인용되는 말인데, ‘그 당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레코드를 구입한 사람은 적었지만, 그들은 모두 밴드를 결성하게 되었다.’



Velvet Underground & Nico - Femme Fatale. 워홀의 뮤즈였던 에디 세즈윅(Edie Sedgwick)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물론 영상의 여자는 니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