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되었다.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섰다. 미술학원 가는 게 좋았다.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이른 저녁 무렵의 한적한 화실이 좋았다. 학생은 나 하나였다. 선생님은 아그리파 같은 석고상을 그리게 한 후 책을 읽었다. 나는 석고상 같은 걸 왜 그려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4B연필을 깨작거리며 선생님이 틀어 놓은 라디오만 들었다. 주파수는 89.1㎒ 고정이었다. 늘 성우 장유진이 진행하던 <가요산책>이 나왔다. 두 시간이 흐른 후, 스케치북에는 선 몇개만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릴 생각이 딱히 없었고, 선생님도 가르칠 생각이 딱히 없었다. 우리는 몇 만원 정도의 돈을 주고받고 시간을 때우고 때워주는 관계였던 것 같다. 그 시간을 대부분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으로 채웠다.
장유진의 목소리는 지금과 별 다르지 않았다. 많은 사연들이 소개되고 많은 노래들이 소개됐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가수들의 음악이 많았다. 들국화와 신촌블루스를 그때 알았다. 누구나 사춘기 때 꽂힌 노래와의 만남을 평생 기억한다. ‘행진’과 ‘골목길’을 처음 들었던 때는 어렴풋하다. 좋아했던 초등학교 동창의 얼굴은 떠오르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수준으로. 시인과 촌장을 처음 들었을 때는 첫번째 짝사랑의 얼굴과 이름, 집까지 또렷한 수준으로 생생하다. 장유진은 누군가의 사연을 읽어준 후 ‘사랑일기’를 틀었다. 그 목소리와 멜로디에, 나는 손에 잡고 있던 연필을 내려 놓고 잠깐 멍하게 있었다. 화실에 쌓여 있는 캔버스의 먼지 냄새와 그 맑은 목소리가 제법 잘 어울렸다. 그날 저녁의 몇 분은 눕혀 그은 연필선처럼 진하다.
지난달 26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이정선과 유지연의 합동 공연이 있었다. 두 포크의 거장이 한 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되어 발간 기념차 가지게 된 공연이다. 가야 할 공연이었지만 당위의 농도를 더한 건 게스트였다. 하덕규와 함춘호, 즉 시인과 촌장이 한 무대에 올랐다. 2000년 재결합 앨범 <더 브릿지> 이후 19년 만이다. 나는 그들의 공연을 본 적이 없다. 너무 일찍 활동을 멈췄고, 재결합은 너무 조용했다. 잠깐이기까지 했다. 크게 기대는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하덕규는 가수로서보다는 목회자로 더 많은 활동을 해왔다. 무대를 떠나있던 그의 성대에 미성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함춘호라는, 신뢰의 이름이 연주하는 기타가 ‘오리지널’을 증명하는 도장처럼 다가올 거라고만 예상했다.
이정선과 유지연의 1부 공연이 끝나고 시인과 촌장이 무대에 올랐다. 첫 곡은 2집에 담긴 ‘풍경’이었다. 기타 전주가 끝나자마자 하덕규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소름이 돋는 데는 첫 소절도 너무 긴 시간이었다. 1980년대의 미성이 마치 박제처럼 보존되어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문학소년처럼 떨리는 호흡이 타임캡슐에서 빠져 나와 공연장에 풀렸다.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가 3분 동안 흘렀다. 객석에서는 진심이 가득한 큰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이 순간을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는, 아우성 같았다. 노래는 이어졌다. ‘가시나무’ 그리고 ‘사랑 일기’. 자신들의 짧은 무대를 주인공처럼 만든 시인과 촌장은 이정선, 유지연과 함께 ‘섬소년’을 연주하는 것으로 공연을 끝냈다. 그들이 퇴장한 후 2부가 시작됐지만 나는 잠시 동안 공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사랑일기’를 처음 들었던 때가 펼쳐졌다. ‘가시나무’를 처음 소개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 이문세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세월이 하덕규의 성대에서 채도를 조금이라도 앗아갔더라면, 함춘호의 손가락에서 섬세함을 거둬갔더라면 그런 감상은 보정된 기억에 불과했을 것이다. 지금 음원 차트 어디에 가져다 놔도 이상하지 않을 감성과 음색이 진심으로부터의 기쁨을 호출했다. 시간의 먼지가 더해졌을 때 무게감을 더하는 음악이 있고, 유리 상자 속에서 시간의 흔적을 비켜나갈 때 빛나는 음악도 있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젊음의 순간에 남은 책갈피 같은 음악 말이다. 중1 때의 어느 저녁이 생생한 이유는 그날, 그들이 낙엽처럼 그 순간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리라. 공부와 그림 대신 음악으로 채우던 하루하루의 어느 저녁에.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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