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들을 때마다 부채 의식이 느껴지는 가수가 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가수 심수봉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1979년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당시 현장에 있었다. 노래를 잘한 죄로 불려갔다가 역사의 격랑에 휩쓸렸다.
‘이 몸이 죽어 한 줌의 흙이 되어도/ 하늘이여 보살펴 주소서 내 아이를 지켜 주소서/ 세월은 흐르고 아이가 자라서 조국을 물어 오거든/ 강인한 꽃 밝고 맑은 무궁화를 보여 주렴.’
심수봉은 이 노래를 가장 아끼는 곡으로 꼽는다. ‘그때 그 사람’이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보다 먼저 꼽는 이유는 뭘까? 사건 직후 그는 한 달간 서울 한남동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방송 출연금지와 출국금지를 당했다. 이 노래는 해금을 기다리던 시절에 우연히 국립묘지에 갔다가 무명용사의 비문을 보고 쓴 곡이다. 아들한테 우리꽃 무궁화를 위한 노래 한 곡 정도는 남겨주고 싶었다.
드디어 해금이 돼서 1985년 MBC TV <쇼 2000>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 어떤 방송에서도 출연 제의가 없었고 노래를 틀어주지도 않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저런 노래가 어떻게 TV에 나오냐?”고 했다는 것이다. 노래보다는 심수봉의 등장이 불편했을 수도 있다.
심수봉은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여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나’라든가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고 썼지만 전체적으로는 뜨거운 조국애를 담은 노래였다. 말로만 해금됐을 뿐 여전히 그는 정치적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북녘땅을 고향으로 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심수봉은 “그냥 당하면 당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고 말한 바 있다.
1976년 남산 도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하던 심수봉을 발굴한 건 손님으로 왔던 나훈아였다. 그날 저녁의 만남이 ‘파란만장 심수봉’을 만들었으니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덕분에 우리는 심수봉의 절창을 듣고 살았으니 고맙고, 고맙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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