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초창기의 이야기다.
당시 나는 술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태권도 사범인 작은아버지와 지내면서 도장의 관리를 도왔던 나는 새벽부터 청소와 선수들의 대회 준비 등으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야 했기 때문이다.
태권도 대회를 마친 어느 날, 공포의 숙취 사건을 떠올려 본다.
당시 나는 선수들의 대회 수상을 축하하며 작은아버지 몰래 축주를 들이켰고, 즐거움은 어느새 고통으로 둔갑했다. 시야는 파도처럼 출렁거렸고 알 수 없는 것들이 나의 머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물을 마셔도 두통약을 먹어도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생에서 처음으로 겪은 공포의 숙취였다.
결국 방구석을 뒹굴대면서 나 자신을 자책하고 이제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야말로 베개 밑에 숨어 사경을 헤맸다. 그때 영웅처럼 나타나 나의 고통을 한번에 해결해주신 분이 할머니였다.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할머니와 함께 짠 하고 내 앞에 나타난 북엇국! 그것이 나를 지옥에서 건져 천국으로 인도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서 먹으라며 다그치던 할머니께 투정을 부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술을 마신 뒤 속이 뒤틀리는 것을 감쪽같이 풀어주는 국이라면서 남기지 말고 호호 불어 마시라는 할머니 말씀이 믿기지 않았지만, 천장 위에 붙어 있는 듯한 내 머리를 움켜쥐고 한 숟가락씩 뜨거운 국을 마셨다. 한 10여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비틀거리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속이 시원해지고 나는 금세 스르륵 잠이 들었다.
할머니 손을 꼭 붙잡고, “사랑해요. 고마워요.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주정 반 투정 반 애교까지 부리면서 무한 반복해 중얼댔다. “그래, 웬 술을 그리 마셨어” 하면서 얼굴을 아기 다루듯 어루만져주신 할머니의 미소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할머니는 어떻게 이런 마법의 레시피를 알고 계셨을까. 어떻게 나의 고통을 단박에 눈치채고 단번에 고쳐주는 보약을 만들어 내시는지 그저 감탄스러웠다. “할아버지도 그리고 네 아빠도 다 이렇게 하면 풀렸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답해주신 할머니의 쿨한 ‘스웩’.
매주 일요일 오후에 방송되는 KBS 예능 프로그램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한국 정통요리를 선보이는 심영순 할머니께서는 사는 방법에 대해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바로 나물을 통해서다. 밑반찬으로만 여겨지는 나물에는 생로병사의 비밀이 담겨 있다.
방송 중 알게 된 한 가지, ‘산나물의 왕’이라 불리는 취나물은 맛과 향기가 뛰어날 뿐 아니라 탄수화물, 비타민 A 등 다양한 영양분이 있고, 그리고 감기, 두통, 진통, 해독, 항암 등에도 효과가 있어 한약재로도 이용된다. 심영순 할머니는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고 하시면서 평생 터득한 비법을 늘 공유한다. 자본주의와 비즈니스 경쟁이 심한 요즘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다.
할머니가 끓여주신 마법의 북엇국과 취나물. 몸에 좋은 보약이 너무나 흔해진 나머지, 그 가치가 퇴색되고 과장광고들에 묻혀 잊혀지는 것들이 많다. 우리는 혹시 일상 속의 중요한 정보, 흔하지만 귀중한 메시지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서 교훈을 얻고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새롭게 터득하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타이거 JK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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