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처럼 이어지는 하얀 복도. 멀리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한다. 잠시 후 소리의 진원지를 발견한다. 어두움 속에서 독경처럼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 음악의 실체와 마주하는 순간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인면조신의 형상을 한 세이렌 대신 파란빛을 발하는 직사각형의 음향기기가 시선을 붙잡는다.
소리의 파장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그의 피아노 독주는 극한의 고독을 지향한다. 그곳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울림을 접한다. 연주자는 키스 재럿. 이곳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ECM(Editions of Contemporary Music) 출신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감상하는 고즈넉한 청음실이다. 때는 2013년 가을. 독일 뮌헨이 본사인 음반 레이블 ECM이 전시회의 주인공이다. 행사명은 ‘ECM :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과연 어떤 음악이 침묵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해답은 1500장이 넘는 음반을 발매한 ECM이 가지고 있다. ECM의 음악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굳이 장르를 논하자면 재즈와 클래식의 어딘가에 속할 것이다. 여기에 세계의 민속음악이 곁들어져 ECM이라는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상징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명훈 지휘자. 연합뉴스
1969년 ECM을 설립한 만프레드 아이허는 새로운 형태의 재즈를 음반에 담아내고자 했다. 1984년 이후 ECM은 뉴 시리즈 발매를 통해서 장르의 벽을 뛰어넘는 실험을 거듭한다. 초창기 ECM 음악이 재즈에 치중했다면 중반기부터는 클래식과 민속음악으로 정체성을 확장한다. ECM의 사운드는 여백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음악과 음악 사이의 공간마저 소중히 여기는 예술정신의 현장이다.
반면 ECM을 단지 장식적인 음악이라고 폄하하는 이가 존재한다.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어쩌면 1960년대 이전의 재즈만을 수용하겠다는 취향일 수도 있고, 록음악을 정점에 세워놓고 여타 장르를 구분짓기 하려는 심산일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레이블이 아닌 음악장르로 인정받는 ECM이 무려 50년간 더딘 걸음으로 그들만의 소리를 창조했다는 거다. 비록 작지만 굳건한 음악철학을 지녔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ECM 현상’은 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하드록이나 1980년대를 지배했던 디스코보다 대중성은 떨어지지만 지속성과 확장성의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만약 ECM이 1980년대부터 등장한 음악자본주의에 영합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작은 음악을 지향하는 ECM의 정신은 승자논리와 유행에 익숙한 대중음악을 향한 소리 없는 도전이다.
기타리스트 팻 메시니. 그는 ECM에서 첫 음반을 선보였던 과거를 이렇게 회고한다. 1976년 음반 발매 후 1년간의 판매량은 1000여장에 불과했다. 호주에서는 겨우 1장이라는 저작권 수익명세서가 도착한다. 만일 팻 메시니가 대형음반사에 속했다면 그의 후속작 발매는 적지 않은 진통을 겪었을 것이다. 음악 또한 권력처럼 가능성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시장이 주도하는 형국이었다. 팻 메시니 그룹은 1982년 발표한 음반 <오프램프>를 통해서 그래미상을 수상한다. 그제서야 음악시장은 팻 메시니와 함께 ECM의 존재감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한편 클래식 피아니스트 언드라스 시프는 ECM을 통해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발표한다. 예술품을 소장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음반 이미지는 ECM만의 자랑이다. 공연과 스튜디오의 녹음음질을 최적화하려는 노력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지휘자 정명훈은 2013년 7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첫 번째 피아노 독주음반을 녹음한다. 그곳에는 ECM의 절반으로 평가받는 만프레드 아이허가 있었다. 지금도 변함없이 ECM은 세계음악의 변방을 자처한다. 자신만의 생을 그려내지 못하고 주류에 휩쓸리는 인간사에 반하는 ECM의 정신이 새롭다. 오늘도 ECM은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찾아 세상의 문을 두드린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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