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다녀왔다. 햇수로 따져보니 어느 영화 제목처럼 꼭 ‘7년 만의 외출’이다. 그동안 뭐가 그리 바빴는지 2004년 전주,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온 이후 국제영화제에 갈 엄두를 못 내다가, 실로 오랜만에 학생들과 들뜬 마음으로 여성영화제가 열리는 신촌으로 갔다. 비오는 일요일 저녁이었는데도! 그런데 하필 내가 점찍어 두었던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며칠 후 다시 여성영화제를 찾았다. 이번에는 절반의 성공. 이날 본 프랑스 영화 역시 수작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예전에 내가 흠모하던 지적인 여배우 쥘리에트 비노슈를 오랜만에 볼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스타의 문화적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즉 <데미지>에서 제러미 아이언스와의 대담한 섹스를 마다하지 않는 젊은 여성 역할에서 <엘르>에서 중산층이자 아내이자 어머니이자 전문직으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중년 여성역할로의 전이-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다가올 그날' (경향신문DB)
학생들과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지금 이 시대에 영화를 보러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됐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같은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일상을 침식하고 지배하고 조직화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대중문화와 영상문화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매개되는 정도를 넘어 점점 기술 의존적이 되어가고 있지만, 다수의 관객들에게 여전히 영화 관람이란 단지 기술적 차원의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일종의 사회적인 의례(ritual)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즉 연인들이 단둘이서 조용히 아이패드로 영화를 보든, 첨단 멀티플렉스에 가서 영화를 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영화 관람이 사회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영화 관람의 주관적 경험이란 영화라는 매체 고유의 물질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영화 장치(cinematic apparatus) -즉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한 영화관, 조용한 분위기, 팝콘 냄새,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 등등- 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지는 총체적 경험이다. 예를 들면, 이제 우리는 영화관에 가면 커플석에 앉아 부둥켜안고 서로를 더듬으며 영화를 즐기는 남녀를 보고도 못 본 체하며 영화를 봐야 하며, 앞에 앉은 관객이 스마트폰으로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고받는 바람에 그 무지막지하게 큰 액정화면 불빛이 내 눈을 부시게 해도 그걸 꾹꾹 참으며 영화를 봐야 하며, 정말 운이 없는 날에는 영화관을 베이비시터로 아는 몰지각한 부모들로 인해 부모 없이 단체로 앉아 떠들고 쩝쩝거리며 내 좌석 등받이를 계속 발로 걷어차는 버릇없는 아이들을 감내해 가며 영화를 봐야 한다.
한데 영화제 특히 국제영화제에서의 영화 관람은 이와는 상당히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야한 영화를 볼 때 침 꼴깍 넘기는 소리가 남에게 들킬까 헛기침을 하거나 극도의 긴장 속에서 보는 것은 비슷하지만, 우선 국제영화제에서는 영화 상영 도중의 출입이 스태프들의 철저한 통제를 받으며,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극장 내 불은 켜지지 않는다. 그곳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도 전에 불을 켜고 관객들이 우르르 자리를 뜨는 그런 반문화적인(?) 영화 관람 방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 또 어떤 영화들은 상영 후 관객들이 마이크를 잡고 감독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즉 영화제란, 감독의 작품을 일방적으로 소비만 하는 수동적인 관객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어느 정도의 능동성과 수행성을 갖춘 관객으로의 변신을 요구하는 세팅인 셈이다. 영화제에서의 영화 관람은 종종 같이 간 사람들과의 즐거운 뒤풀이 자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영화에 대한 기억과 뒤풀이 자리에서의 흥겨운 영화 이야기를 하나의 단일한 기억으로 한꺼번에 저장하고 또 소환하곤 한다. 이제 이런 새로운 경험을 위해, 설렘을 위해 떠날 때다. 여성영화제, 전주영화제는 끝났지만 이제 제천음악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