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의 마지막회는 그동안 제작에 참여했던 스태프와 배우가 함께 촬영한 현장 사진 한 장이 엔딩을 장식하곤 한다. 겨울에는 두꺼운 외투를, 여름에는 까맣게 그을린 피부를 볼 수 있는데, 수많은 제작진의 열정과 노고로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된다는 것을 그 사진 한 장을 통해 전한다. 졸고 있는 막내 스태프의 모습이나 배우 연기를 숨죽인 채 바라보는 스태프들의 모습이 몇 초간 화면 속에 등장할 때면, 뭔가 울컥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드라마 제작 현실은 달랐다. 스태프들은 휴식시간과 수면시간도 보장받지 못했다. 게다가 일할 사람들은 많다며 노동의 대가와 계약사항을 지킬 것에 대한 요구는 내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는 것으로 답이 돌아왔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몇 년 동안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알려졌다.
안전점검이 부재한 제작 현장에서 일을 하던 드라마 스태프가 3m 높이에서 떨어져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드라마 PD는 장시간 노동과 과중한 업무부여, 심리적 압박감으로 인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미술 스태프는 장시간 노동으로 과로사했다. 그리고 프리랜서 카메라 감독은 상품권으로 월급을 지급받는 세상이다.
방송 드라마는 대중문화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문화산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제성장에서부터 드라마가 대중에게 선사하는 감동과 즐거움, 관련 문화상품의 확산까지. 한류의 시작이 드라마 <겨울연가>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가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드라마 스태프들의 장시간 노동과 심리적 압박, 실시간 촬영에 가까운 드라마 제작방식, 외주제작사의 임금 지급 문제 등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국내 방송문화를 선도하고 있다는 지상파와 종합편성 채널, 그리고 CJ E&M이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 해결은커녕, 개선되어야 할 문제 많은 제작환경을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노출 요소로 활용하곤 했다. 휴식공간 없이 장시간 노동으로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카메라 앞에서 졸고 있는 스태프들은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곤 했다.
방송의 공공성을 지키고, 대중문화 생산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방송사가 노동착취, 임금 미지급,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드라마 콘텐츠의 결과만을 평가하는 우리 사회의 승자독식과 성과주의도 바뀌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문제는 노동자 스스로 문제 해결을 위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드라마 스태프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2017년 청년 유니온은 방송콘텐츠 제작 현장 종사자로부터 받은 제보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는데, 제작기간 중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9.18시간(최소 12시간, 최대 23시간)이었으며, 평균 휴일은 한 달 기준 4일, 일주일 기준 0.9일에 불과했다. 2016년 OECD 회원국 월평균 노동시간은 147시간(연평균 1764시간)이며, 최장시간 노동국가인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 장시간 노동을 하는 한국 일반노동자는 월평균 노동시간이 172시간(연평균 2069시간)이다. OECD 가입국에서도 한국은 최장시간 노동국가 중 하나로 나타났는데, 이보다 더 많은 시간 일을 하는 것이 방송 노동자들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방송사들은 문제가 생기면, 외주 제작사에 책임을 돌리거나, 노동자 개인의 문제로 귀결 짓는 방식을 반복해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방송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방송 노동자들의 연대가 시작되었고, 대중들도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동참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작사와 방송사는 문제의 심각성을 덮을 만한 이슈를 찾거나 외면하는 방식을 이제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노동착취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언제까지 성공할 것이라 기대하는가.
<이종임 | 문화연대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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