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오브 사운드, 비틀즈의 등장이 있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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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블라블라

월 오브 사운드, 비틀즈의 등장이 있기까지


뉴욕 브릴 빌딩. 60년대 중반까지의 틴 팬 앨리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많은 스타일이 나타난 이 시대에 좀 더 혁신적인 음악이 존재했다.

모타운, 스택스 등과 비교하여, 흑인 음악의 전통과는 좀 더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물론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로큰롤의 전통을 버리지는 않고, 동시대 브릴 빌딩의 틴 팬 앨리 팝을 일신시켜 대중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인물은 필 스펙터(Phil Spector)였다. 틴 팬 앨리(Tin Pan Alley)는 본래 뉴욕 맨하탄 28번가와 브로드웨이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대중 음악계의 의미는 물론 백인 중산층의 음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로큰롤의 등장 이후에는 전통적인 재즈 팝과 로큰롤이 접목된 형태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즉, 유럽의 그것과는 다른 미국만의 ‘스탠더드 팝’ 이 틴 팬 앨리였던 셈이다.

그리 뛰어나지 않은 외모에 심지어 유태인이었던 스펙터는 뮤지션으로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빛을 본 부분은 이후 그의 프로듀서로서의 활동이었고, 1961년 필리스(Philles) 레코드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을 알린 사운드 메이킹의 실험을 시작한다. 멜로디 중심의 당대의 음악의 일반적 모습과는 달리 그는 리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프로듀서로서 그는 곡을 ‘완만하게’ 다듬으면서도 로큰롤의 강렬함을 유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캐롤 킹(Carole King)과 제리 고핀, 엘리 그리니치와 제프 베리 등의 당대 최고의 송라이터들을 끌어들인 뒤,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 라는 새로운 레코딩 기술을 통해 동시대의 어떤 음악보다도 강렬하고 혁신적인 음악을 만들어냈다.

월 오브 사운드는 원래 제트기가 음속을 처음 돌파했을 때 현대 문명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었다. 많은 연주자와 가수들을 같은 공간에 몰아 넣고, 장시간의 녹음 및 멀티트래킹(multitracking)과 에코 등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두터운 벽과 같은 사운드는, 단순한 구조를 가졌던 스탠더드 팝에 격정을 주입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비평가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가 이를 ‘바그너풍의 로큰롤’ 이라 칭한 것은 그런 면에서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또한 그가 - 뮤지션이기도 했었지만 - ‘프로듀서’ 라는 것이 중요하다.

스펙터는 곡의 녹음만이 아니라 창작의 영역에 개입하기 시작한 프로듀서였다. 스튜디오에서 구현되는 완벽한 형태의 사운드는 무대에서 승부하는 다른 가수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배출했던 그룹들이 몰개성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크리스털스(Crystals)나, 스펙터의 아내가 되기도 하는 베로니카 베넷(Veronica Benette)가 있었던 로네츠(Ronettes)는 당시의 걸 그룹들이 ‘수줍게 노래하는’ 모양새였다면, 허스키한 목소리로 활달하게 노래하는 이들은 남자들만큼 도발적이지는 못했지만(그런 거 가만 놔둘 시대가 아님을 생각해 보자) 충분히 개성적이었다. 그렇지만 그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음악적 ‘언어’ 를 만든 것은 분명 필 스펙터였으며, 비틀즈가 등장하여 좀 더 원초적인 에너지를 중요시하는 상황이 도래하기까지(66년에 이르러서는 필 스펙터 본인도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음악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Ronettes - Be My Baby. 아마도 영화 '더티 댄싱' 의 사운드트랙으로 유명할 것이다. 특히 너무나 유명한 드럼 인트로에 주목.
 
 
스펙터는 이후 이전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지만, 조지 해리슨이나 존 레넌, 라몬스(Ramones) 등의 레코딩에 참여해 오다가, 작년에 여배우 라나 클락슨의 살인 혐의로 2급 살인죄를 인정받아 복역 중이다.

필 스펙터가 내놓은 그룹들 외에도, 인기를 끌었던 그룹에는 뉴욕의 조지 ‘섀도’ 모턴이 레드 버드(Red Bird) 레코드를 통해서 내놓은 샹그리라스(Shangri-Las)가 있었다. 사실 당대에 가장 빠르게 성공했던 걸 그룹이라면 단연 샹그리라스일 것이다. 두 쌍의 백인 자매로 구성된 이 그룹은 ‘Leader of the Pack’ 을 통해 차트의 정상을 정복함은 물론이고, 사생활에 있어서도 로큰롤의 반항적인 ‘남성들’ 에 못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뮤지션들의 분투에도, 로큰롤과 리듬 앤 블루스가 음악의 중심 무대에서 밀려난 이후, 미국의 음악계의 활력이 잦아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50년대 말부터 등장해 온 십대들을 위한 백인 우상들이나, 플래터스 등의 보컬 그룹 등은 음악의 제작은 이제 음반 제작자들의 업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예였고, 젊은이들이 50년대에 그랬던 것과 같이 ‘자신들의 음악’ 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을 발견하기에는 더 시간이 필요했다.

로큰롤은 미국이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이후 그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의 대중 음악을 50년대 당시 지배하고 있던 것은 사실상 BBC였고, BBC는 보수주의가 지배적이었다. 문화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던 BBC의 음악/오락 방송은 무비판적인 청중의 모습을 전제하고 있었고, 대중음악의 미학에 대해서 50년대 이전의 스윙 기악곡에 가까운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50년대 중반까지 영국의 팝 음악이 거의 스윙 스타일의 댄스곡들로 점철되어 있었음은 의미심장하다.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빅터 실베스터(Victor Sylvester) 오케스트라 밴드일 것이다. 물론 주요 음반사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 BBC의 지침을 수용해야 한다. ‘Rock Around the Clock’ 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영국의 언론은 이런 자신들의 대중문화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보수화되었으나(주로는 ‘상업주의적인 미국 문화에 우리의 아이들을 더럽힐 수 없다!’ 식의 형태를 띠었다) 로큰롤은 곧 영국의 노동계급 십대들에게 자신들의 이미지를 전달해 주었고, 미국과는 달리 2차대전 이후 식민지들의 통치권을 상실하면서 자본주의의 위기에 빠졌던 영국에서 로큰롤은 미국에서의 그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로니 도네건(Lonnie Donegan) - 1966년 월드컵 주제가를 부른 것으로도 유명한 - 으로 대표되는 스키플(skiffle)은 한계에 이른 기성의 통제와 로큰롤에 대한 요구의 절충적인 모습이었을 것이고, 곧 그 토양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 비틀즈(Beatles)였다.

Lonnie Donegan - Rock Island 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