탠저린 드림. 일렉트로닉스에 관한 가장 선구자적인 밴드들 중 하나면서, 뉴에이지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프로그레시브 록은 주로 영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장르였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도 많은 밴드들이 등장했다.
사실 영국만큼 뛰어난 밴드가 많이 나타난 곳이 없었다 뿐, 유럽 전역이나 일본, 미국 등 많은 곳에서 밴드들이 연주하고 있었다. 사실 누가 뭐래도 록 음악의 종주국은 분명 영국과 미국이었고, 전후 로큰롤과 록 음악은 당연히 유럽의 젊은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영국과 미국이 자신의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면, 이들은 수입된 영국과 미국 밴드들을 답습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 차이가 있겠다. 60년대 말은 바로 이런 영, 미 외의 밴드들이 그런 답습이 아닌 자신들의 음악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한 시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프로그레시브 록은 그 시기의 분명한 조류였다.
P.F.M - Impressioni D i Settembre
이런 밴드들은 대부분은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의 영향을 이어받았으나, 동시에 자신들의 전통과 접목시켜 독창성을 확보하는 이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우리의 경우에는 특히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 록이 유명할 것이라고 생각한다(90년대 S레코드의 꾸준한 재발매가 참 컸다). “Concerto Grosso Per. 1” “Per. 2” 앨범으로 국내에서 많은 팬을 얻기도 했던 뉴 트롤즈(New Trolls)나(사실 이 분들은 앨범마다 수준차도 크고 스타일도 상당히 차이가 있어 좀 골치아픈 분들이다)
루치오 바띠스띠(Lucio Batistti - 이탈리아 록 음악을 듣는다면 모골(Mogol)과 더불어 이 분을 모르기도 정말 쉽지 않다)가 이끌던 1970년대의 비트록 밴드 꿸리(I Quelli)로부터 등장한 P.F.M(Premiata Forneria Marconi)와 포르뮬라 뜨레(Formula 3), 일 볼로(Il Bolo), 일 발레또 디 브론조(Il Balletto di Bronzo) 등 많은 밴드들이 활동하였고,
그 외에도 이탈리아 깐쪼네의 전통을 계승한 안젤로 브란두아르디(Angelo Branduardi)나 파올로 프레스꾸라(Paolo Frescura), 마우로 펠로시(Mauro Pelosi), 클라우디오 바리오니(Claudio Baglioni)와 같은 ‘깐따우또레(Cantautore)’ 들이 훌륭한 음악을 들려주었다. (우측 사진 : 1975년 P.F.M의 밀라노 라이브)
그 외에도 이 시기의 잘 알려진 유럽의 프로그레시브 밴드라면 그리스의 아프로디테스 차일드(Aphroditte's Child)나 네덜란드의 포커스(Focus), 일본의 플라워 트래블린 밴드(Flower Travellin' Band), 프랑스의 마그마(Magma) 등 많은 밴드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런 밴드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많은 밴드들이 이 시기에 나타나고 명멸해 갔다.
Magma - Kohntarkosz Pt. 1, 1999년 Progfest에서의 연주
그렇지만 영국을 제외하고 가장 독창성을 확보한 곳으로 꼽히는 씬은 독일의 프로그레시브 록, 소위 ‘크라우트록(krautrock)’ 이었다. ‘크라우트’ 는 독일식의 양배추 절임을 얘기하는 것이니, 대충 우리로 치면 김치 정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명칭부터가 ‘독일적인’ 록 음악을 지칭하는 셈이었던 것이다.
이 크라우트록 밴드들이 독창적인 음악을 들고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 또한 60년대 후반이었다.
Can - Mother Sky(edited ver.)
롤링 스톤즈나 비틀즈의 스타일을 답습하는 음악이 주류였지만, 68년 이후 캔(Can), 노이!(Neu!), 아몽 뒬(Amon Duul), 파우스트(Faust), 탠저린 드림(Tangerine Dream) 등이 크라우트록의 선두 격으로서 활동을 해 나갔다.
이들의 음악은 당시의 블루스 록이나 비틀즈 등의 스타일과는 동떨어진 것이었고,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통상 분류되기는 하나 영국의 스타일과도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브리티쉬 록 밴드들이 기존의 록 음악을 기준으로 그 확장이나 변형을 시도하였다면, 크라우트록 밴드들은 그러한 전통과 상당히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캔의 홀거 추카이(Holger Czukay)는 현대음악가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의 제자이기도 했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사실인 셈이다. (물론, 덕분에 캔은 많은 실험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 캔의 ‘아방가르드’ 는 다른 소위 ‘아방가르드’ 밴드들과 같이 듣기 힘든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들만큼 소박한 면이 있는 음악도 찾기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뜻인가? 캔은 일렉트로닉스 리듬을 전자악기가 아닌 것으로 연주한 흥미로운 친구들이었던 것이다. (포폴 부(Popol Vuh)와 같이)
노이! 도 유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는 밴드라고 생각한다. ‘모토릭(motorik)’ 하면서도 생기가 있었던 노이!의 리듬은 미니멀리즘적이면서도 분명히 미래적이었고, 이는 처음에는 미니멀리즘과 전자음악을 결합하는 시도를 했다가 점차 ‘록’ 의 범주를 벗어나기 시작한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와도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파우스트는 록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밴드 중 하나일 것이지만 암암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밴드이기도 하다. 저널리스트이자 프로듀서였던 우베 네틀벡(Uwe Nettlebeck)을 중심으로 한 파우스트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의 분절된 사운드와 전자 비트 및 일렉트로닉 노이즈, 사이키델릭 등이 혼재된 사운드를 들려주었고, 해산 전 마지막 콘서트에서 하라는 공연은 안 하고! 멤버들끼리 탁구만 치는 등의 여러 악명 높은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Amon Duul II - Stumbling Over Melted Moonlight
아몽 뒬, 그리고 아몽 뒬 쯔바이(Amon Duul II. 참고로 Amon Duul이라는 영국 밴드도 있다)는 68년 당시 뮌헨에 있었던 ‘아몬 뒬’ 이라는 꼬뮨 - 11명의 어른, 2명의 아이로 구성된 - 으로부터 파생된 밴드인데, 멤버들의 출입에 대한 제재가 없었기 때문에(밴드 멤버라기보다는 그 공동체의 멤버였던 셈이다) 그 교체도 매우 빈번했고, 독일 록 밴드들 중에서도 가장 ‘프리한’ 음악을 들려준 이들이기도 했다.
밴드의 가장 잘 알려진 앨범은 “Yeti” 나 “Wolf City” 이지만 구체음악의 방식을 록 음악에 가장 극명하게 재현한 사이키델릭으로서 “Psychedelic Underground” 도 큰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왜 아몽 뒬과 쯔바이가 따로 존재하는가? 이는 뒤에 이 꼬뮨이 정치 도구로서의 음악을 주장하는 그룹(Amon Duul I)과 예술지상주의적 음악을 주장했던 그룹(Amon Duul II)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 출신의 ‘푸어(poor)’ 했던 밴드들의 모임이라고 폄하되기도 하는 크라우트록에 있어서 적어도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영국이나 미국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프랑스 등 각국이 점차 블루스 등은 물론 자국의 클래식 및 대중 음악의 전통에서 록 음악을 발전시켜 나간 반면, 독일은 전자음악을 추구했던 밴드들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았던 밴드들도 비교적 그런 전통과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프로그레시브’ 를 음악적 진보라고 단순히 얘기한다면, 이들만큼 그런 표현에 잘 어울리는 밴드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현대의 미학적 경향과도 뭔가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밴드의 가장 잘 알려진 앨범은 “Yeti” 나 “Wolf City” 이지만 구체음악의 방식을 록 음악에 가장 극명하게 재현한 사이키델릭으로서 “Psychedelic Underground” 도 큰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왜 아몽 뒬과 쯔바이가 따로 존재하는가? 이는 뒤에 이 꼬뮨이 정치 도구로서의 음악을 주장하는 그룹(Amon Duul I)과 예술지상주의적 음악을 주장했던 그룹(Amon Duul II)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 출신의 ‘푸어(poor)’ 했던 밴드들의 모임이라고 폄하되기도 하는 크라우트록에 있어서 적어도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영국이나 미국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프랑스 등 각국이 점차 블루스 등은 물론 자국의 클래식 및 대중 음악의 전통에서 록 음악을 발전시켜 나간 반면, 독일은 전자음악을 추구했던 밴드들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았던 밴드들도 비교적 그런 전통과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프로그레시브’ 를 음악적 진보라고 단순히 얘기한다면, 이들만큼 그런 표현에 잘 어울리는 밴드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현대의 미학적 경향과도 뭔가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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