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키델릭 록은 히피의 시대에 세계적인 반응을 얻었고, 대중문화의 정치, 사회적 기능이 부각되기 시작했음은 이미 이야기하였다. 즉, 이 시기는, 요새야 사이키델릭 록을 듣고 피곤하다고 하는 일반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사이키델릭 록이라고 소개되면서 앨범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시기였다는 것이다. 많은 언더그라운드의 밴드들이 발굴되었고, 다양한 색채를 가지고 있었던 사이키델릭 록은 이후 포크 록이나 프로그레시브 록의 등장 및, 녹음기술의 발전 등을 가져올 수 있었다.
역시 앞서 말했지만, 1967년까지의 사이키델릭 록이 상대적으로 실험성을 강조한 사운드가 주류였다면, 1968년부터는 이러한 실험성을 기반으로 한 다양성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적어도 60년대 후반으로 들어오면서, 사이키델릭 록은 개인적이며 내면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는 음악이 되었고, 뮤지션과 청중들의 폭도 기존보다는 더 넓어진 만큼 음악의 폭도 기존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 나타난 여러 뮤지션들, 특히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을 빨리 청중들에게 알리고 인기를 모으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겠는가? 곧 록 페스티벌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호탄은 1967년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일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조그만 도시였던 몬테레이는 최초의 국제적인 록 페스티벌이면서, 보통 얘기하는 ‘love generation’ 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마마스 앤 파파스(Mamas & Papas)의 존 필립스(John Phillips)가 이 페스티벌의 주최자 중 하나로 참여하기도 해서 유명하지만, 5만 명이라는 인파가 모여들었던 무료 자선공연이었고, 짐 모리슨과 함께 소위 ‘3J’ 불리는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와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이 등장했던 페스티벌이기도 했다.
시애틀 태생이었지만 로큰롤의 암흑기였던 미국에서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거기다 가난했고, 고교 때부터 이미 마약에 손을 댄 사고뭉치였던) 헨드릭스가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영국에서였다.
애니멀스의 베이시스트였던 채스 챈들러에 의해 발굴되어 헨드릭스가 미치 미첼(Mitch Mitchell), 노엘 레딩(Noel Redding)과 함께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Jimi Hendrix Experience)라는 이름으로 1967년 발표한 “Are You Experienced?” 는 곧 전세계적 성공을 거두었고, 단연 몬테레이 페스티벌에서의 최고 스타도 헨드릭스였다.
에릭 클랩튼이나 제프 벡, 마이크 블룸필드 등 동시대의 기타리스트들이 그의 연주를 듣고 한동안 기타를 잡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특히나 클랩튼은 거의 헨드릭스 코스프레까지 했을 정도) 최고의 기타리스트였던 그는 탁월한 펑키 감각은 물론 강한 열정의 연주자였고, 그때까지 소음으로 치부되는 굉음 등을 연주의 영역에 끌어들였다.
Jimi Hendrix - Foxy Lady. Rainbow Bridge에서의 라이브
빅 브러더 앤 더 홀딩 컴퍼니(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의 보컬리스트였던 재니스 조플린은 팝 씬에서 4년 남짓 활동했을 뿐이지만, 현재까지 여성 로커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사실 동시대 사이키델릭 씬의 다른 여성 보컬리스트들 - 그레이스 슬릭과 같은 - 과도 비교할 때, 여성적이지 않았던 외모와, 밴드를 압도할 정도로 폭발적인 목소리는 다른 보컬리스트들과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조플린은 많은 밴드에서 활동을 했지만, 공통점은 그녀의 강력한 목소리는 나머지 멤버들을 거의 백 밴드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 ‘가장 못생긴 남성’ 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우측 사진 참고. 물론 그레이스 슬릭이 왼쪽이다)
겨우 27세에 요절한 탓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데뷔작이었던 “Cheap Thrills” 은 사이키델릭 록의 가장 뛰어난 앨범의 하나로 꼽히고, 특히 앨범에 실렸던 조지 거쉰(George Gershwin)의 곡이었던 ‘Summetime’ 은 수많은 버전들 중에서도 최상의 것으로 손꼽히는 곡이다.
Janis Joplin - Summertime
페스티벌의 절정은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 동안 열렸던 우드스탁 페스티벌이었다. 원래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 페어(Woodstock Music and Art Fair)라 명명된 이 콘서트는 당초 예상으로는 약 5만 명 정도를 수용할 예정이었다고 하나, 각지에서 몰린 40만 명 가량의 인파로, 본래 유료 공연이었으나 무료 공연화되었던 축제였다. (처음부터 뭐 히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그런 행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 카커(Joe Cocker), 텐 이어즈 애프터(Ten Years After) 등 그 당시까지 무명이던 많은 밴드와 가수들이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원래 유료 공연으로 시작했던 만큼 충돌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유료 입장 관객들 입장에서는 기획사에 화를 낼 법도 하다) 3일 동안 수많은 사람이 맥스 야거즈의 농장에서 추위를 참아 가며 서로의 감정과 음악적 교감을, 그야말로 법의 테두리도 없이 나눌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현재까지 일종의 ‘록의 이데아’ 식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게 어쨌든 현실이 아닌 이데아에 그쳤다는 것이다. 음악 비즈니스에게는 이런 페스티벌 붐은 최고의 흥행의 기회였다. 대규모 페스티벌들이 속속들이 생겨났고, 이젠 밴드들은 그런 페스티벌에 서지 않으면 밴드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갔다. 더 이상 록 페스티벌이 순수한 이상향같이 받아들여지기는 이젠 어려워진 것이다.
물론 그건 청중들도 알고 있다. 우드스탁의 모습과는 달리, 사람들도 이젠 다양한 음악을 마음 편하게 즐기기 위해 페스티벌을 찾기 시작했다.
1969년 10월의 앨터몬트 페스티벌(Altamont Festival)은 그런 이상이 확실히 사라졌음을 알려 주는 것일 것이다. 당시 공연의 진행과 경비를 맡았던 헬스 앤젤(Hells Angel)소속의 경비원이 이 롤링 스톤즈가 ‘Sympathy for the Devil’ 을 연주하는 동안 혼잡하던 무대 앞의 흑인 청년 한 명을 살해하고 만 것이다. 이미 이런 페스티벌 등에 대해 ‘이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타락한 성지’ 식의 언론 보도는 계속 나오고 있었다(뭐 요새와도 그리 틀린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이 페스티벌로 한동안 계속 붐을 일으키던 록 페스티벌은 (없어진 건 물론 아니지만)한풀 꺾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헬스 앤젤의 진행경비는 500달러였다는데, 그 500달러에 소위 ‘히피의 이상’ 이 꺾여 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조 카커(Joe Cocker), 텐 이어즈 애프터(Ten Years After) 등 그 당시까지 무명이던 많은 밴드와 가수들이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원래 유료 공연으로 시작했던 만큼 충돌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유료 입장 관객들 입장에서는 기획사에 화를 낼 법도 하다) 3일 동안 수많은 사람이 맥스 야거즈의 농장에서 추위를 참아 가며 서로의 감정과 음악적 교감을, 그야말로 법의 테두리도 없이 나눌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현재까지 일종의 ‘록의 이데아’ 식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게 어쨌든 현실이 아닌 이데아에 그쳤다는 것이다. 음악 비즈니스에게는 이런 페스티벌 붐은 최고의 흥행의 기회였다. 대규모 페스티벌들이 속속들이 생겨났고, 이젠 밴드들은 그런 페스티벌에 서지 않으면 밴드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갔다. 더 이상 록 페스티벌이 순수한 이상향같이 받아들여지기는 이젠 어려워진 것이다.
물론 그건 청중들도 알고 있다. 우드스탁의 모습과는 달리, 사람들도 이젠 다양한 음악을 마음 편하게 즐기기 위해 페스티벌을 찾기 시작했다.
1969년 10월의 앨터몬트 페스티벌(Altamont Festival)은 그런 이상이 확실히 사라졌음을 알려 주는 것일 것이다. 당시 공연의 진행과 경비를 맡았던 헬스 앤젤(Hells Angel)소속의 경비원이 이 롤링 스톤즈가 ‘Sympathy for the Devil’ 을 연주하는 동안 혼잡하던 무대 앞의 흑인 청년 한 명을 살해하고 만 것이다. 이미 이런 페스티벌 등에 대해 ‘이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타락한 성지’ 식의 언론 보도는 계속 나오고 있었다(뭐 요새와도 그리 틀린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이 페스티벌로 한동안 계속 붐을 일으키던 록 페스티벌은 (없어진 건 물론 아니지만)한풀 꺾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헬스 앤젤의 진행경비는 500달러였다는데, 그 500달러에 소위 ‘히피의 이상’ 이 꺾여 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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