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프로그레시브 록은 매우 다채로운 면모들을 지니고 있던 장르였지만, 이것이 그 시절의 유일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60년대의 일렉트릭 기타의 재발견, 새로운 시도들의 등장은 또한 이전보다 좀 더 ‘거칠고 공격적인’ 사운드, 즉 하드 록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적어도, 60년대의 일렉트릭 기타의 재발견, 새로운 시도들의 등장은 또한 이전보다 좀 더 ‘거칠고 공격적인’ 사운드, 즉 하드 록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사실 오늘날 록/메틀에 대한 일반의 인상을 생각한다면, 이런 공격적인 면모는 록/메틀을 다른 장르의 대중 음악과 구별짓는 속성이라고 할 것이니,(물론 공격적이지 않은 경우도 매우 많지만) 하드 록 이전에는 모든 밴드가 거칠지 않고 얌전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당장 비틀즈보다 롤링 스톤즈나 후는 더 거칠었고, 엘비스 프레슬리나 에디 코크란 등도 다른 기존의 가수들보다는 확실히 더 거칠었다. 아울러, 프로그레시브 록과 ‘하드 록’ 이 전혀 접점 없는 장르였던 것도 또한 아니다. 많은 프로그레시브 밴드들 또한 그만큼 거친, ‘프로그레시브 하드 록’ 연주를 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런 ‘더 거친 사운드들’ 은 노동계급 청년들의 하위 문화로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앞서 브리티쉬 인베이전을 얘기하면서 순수 로큰롤 애호가들과 모드, 로커를 얘기했던 걸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모드와 로커는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부류들이었지만, 이는 어쨌든 영국 청년문화의 모습이었고, 청년문화 이상의 하위 문화와 연결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런 ‘더 거친 사운드들’ 은 노동계급 청년들의 하위 문화로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앞서 브리티쉬 인베이전을 얘기하면서 순수 로큰롤 애호가들과 모드, 로커를 얘기했던 걸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모드와 로커는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부류들이었지만, 이는 어쨌든 영국 청년문화의 모습이었고, 청년문화 이상의 하위 문화와 연결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후나 롤링 스톤즈 같은 밴드의 더 거친 음악이 더 거친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공감을 더 많이 얻었을 수는 있겠지만, 이런 밴드들이나 비틀즈 등의 밴드들이나, 팝 음악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즉, 그런 하위 문화로서 역할하게 되는, 특정한 록 음악 스타일로서 하드 록이 자리매김한 것도 60년대 말엽부터의 ‘브리티쉬 하드 록’ 및 미국의 하드 록이라고 할 것이다.
브리티쉬 하드 록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얘기해야 할 것은 아무래도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일 것이다.
영국의 블루스 록에서 등장했던 야드버즈(Yardbirds)가 마지막 콘서트를 한 것은 1968년 7월이었고, 이후 야드버즈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은 지미 페이지(Jimmy Page)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즉, 그런 하위 문화로서 역할하게 되는, 특정한 록 음악 스타일로서 하드 록이 자리매김한 것도 60년대 말엽부터의 ‘브리티쉬 하드 록’ 및 미국의 하드 록이라고 할 것이다.
브리티쉬 하드 록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얘기해야 할 것은 아무래도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일 것이다.
영국의 블루스 록에서 등장했던 야드버즈(Yardbirds)가 마지막 콘서트를 한 것은 1968년 7월이었고, 이후 야드버즈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은 지미 페이지(Jimmy Page)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 존 보냄(John Bonham)이 합류해서 결성된 밴드의 처음의 이름은 덕분에 뉴 야드버즈(New Yardbirds)였는데, 지미가 야드버즈라는 이름에 사실 애착이 컸던 것은 아니고, 이미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던 야드버즈의 이름을 이용하려는 흥행사들의 의도였다는 것이 정설인 듯하다. (그래서 10월 하순의 공연에서는 후의 키스 문의 제안으로, 드디어 레드 제플린이란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제플린 이전에도 이미 단독의 싱글 등으로 나름의 활동을 해 왔던 실력파들이 모였던 밴드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어느 정도는 이질적이었던 이들의 재능이 합쳐져 나온 음악은 모두를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도 성공적이었지만(정원 1만 명의 공연장에 2만 1천 명이 몰려오는 등) 제플린의 미국에서의 성공이란 놀라운 것이었다.
아마 전성기의 비틀즈의 인기를 능가했던 밴드가 있다면 제플린일 것이다. 앨범의 엄청난 판매로 영국 상공부에서 감사표창에다 작위까지 받는 수준이었고(하긴 U2는 아일랜드에서 거의 대기업 수준이라고도 하더라), 내셔널 팝스 폴스(National Pops Polls)에서 국외 부문에서 오랫동안 1위를 차지하던 비틀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도 제플린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인기라는 면에서 끝내 제플린이 비틀즈를 제쳤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고, 판매고에서라면 핑크 플로이드보다도 뒤지지만, 남성적인 록 사운드를 대변한 전설적인 밴드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뭐 그렇다고 제플린이 그 ‘남성적인’ 음악만 했던 것도 아니다. 제플린은 블루스, 포크는 물론 (“Physical Graffitti” 같은 앨범에서는)프로그레시브 사운드까지 훌륭하게 해 낸 밴드이기도 했다.(뭐 괴물들은 뭘 해도 잘 한다는...)
(하긴 제플린의 노래 중에 안 유명한 게 얼마나 되려나...)
딥 퍼플(Deep Purple)은 최근까지도 활동해 온 브리티쉬 하드 록의 거목이다. (지금도 하고 계시려나...)
클래식으로 실력을 쌓아 온 해먼드 오르간 연주자인 존 로드(Jon Lord)를 중심으로 결성된 딥 퍼플은 1968년에 데뷔한 제플린과 동시대의 밴드였으나, 제플린과는 많은 면에서 틀린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존 로드나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의 연주는 처음부터 강렬하긴 했으나, 이 시절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에 가까운 사운드였고, (첫 싱글 ‘Hush’ 덕이겠지만/물론 이 시절에도 라이브에서는 앨범보다 더 거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보진 못해서 모르겠다만)영국에서의 평범한 인기와는 달리 미국에서 더 큰 반응을 얻었던 밴드였다. 미국에서 프로그레시브 록이 그리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1969년 이언 길런(Ian Gillan), 로저 글로버(Roger Glover)를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잘 알려진 딥 퍼플의 전성기 멤버를 구성하게 되면서 밴드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적어도 “In Rock” 앨범부터는 리치 블랙모어의 기타가 존 로드의 오르간과 함께 주가 되었고, 이언 길런의 샤우팅 보컬이 합쳐지면서 딥 퍼플의 고유한 모습이 완성되었고, “In Rock” 과 “Fireball”, “Machine Head” 같은 이들의 명작들은 분명 이후의 헤비 메틀 사운드를 예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많은 패밀리 밴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멤버 교체 없이 공고한 팀웍을 유지했던 제플린과는 달리, 딥 퍼플은 매우 멤버 교체가 심한 밴드이기도 했다.
73년 이언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탈퇴하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이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과 글렌 휴즈(Glenn Hughes)였다. 리치 블랙모어가 밴드를 떠난 뒤에 들어온 새 기타리스트는 천재 기타리스트로 알려진(물론 그가 참여한 딥 퍼플의 앨범은 쫄딱 망했지만) 토미 볼린(Tommy Bolin)이었다.
중간에 해체기를 가졌지만 이후에는 조 새트리아니(Joe Satriani, 잠깐이었지만)와 스티브 모스(Steve Morse)를 기타리스트로 계속 활동해 오고 있는데, 이런 여러 멤버들이 딥 퍼플을 나가서 꾸린 밴드들이 레인보우(Rainbow),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 길런(Gillan) 등으로, 뒤에 또 등장하겠지만 헤비 메틀에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밴드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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