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새버스. 헤비메틀 팬에게는 거의 불멸의 존재처럼 여겨지는 이름이다. 2005년의 라이브
1970년대 록 음악을 얘기하면서 또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점은 헤비메탈의 등장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과연 헤비메틀이 어떤 음악인지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건 생각보다 간단한 것은 아닌데, 보통 헤비메틀이 하드 록 밴드 음악에서 진화했다고 한다면, 하드 록도 이전보다 ‘좀 더 거칠고 공격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었음을 고려할 때, 하드 록과 헤비메틀의 경계는 상당히 모호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차이를 얘기할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는 리프상의 차이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베이스 리프가 위주가 되었던 기존의 하드 록과는 달리, 헤비메틀에서는 기타 리프가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고, 블루스나 포크의 영향이 단절된 것은 아니지만 하드 록에 비교해서는 그런 부분은 감소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비메틀이 폭발적인 사운드로 특징지어진다면, 나중에 얘기할 ‘더욱 극단적인’ 메틀 장르의 경우 흑인음악의 요소가 점점 약해진다는 것은 이런 부분을 뒷받침하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헤비메틀 밴드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블루 오이스터 컬트(Blue Oyster Cult)(이 용어는 보통 평론가 레스터 뱅스(Lester Bangs)가 먼저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 사용할 때는 특정 밴드를 지칭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일 것이나, 이들은 물론 블루 치어(Blue Cheer), 미국의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Grand Funk Railroad), 마운틴(Mountain) 등은 이런 기준에서는 헤비메틀이라기보다는 하드 록 밴드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고, 그렇다면 본격적인 헤비메틀 밴드의 등장은 블랙 새버스(Black Sabbath)부터 얘기해야 할 것이다. ▲ 블루 오이스터 컬트
말 나온 김에 한 곡. Blue Oyster Cult의 스매쉬 히트 곡. 'Don't Fear the Reaper'
물론 블랙 새버스는 이미 1970년에 데뷔작을 낸 밴드이니, 제플린이나 딥 퍼플과 사실상 동시대의 밴드이지만, 그들의 음악은 이들과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딥 퍼플의 날카로움이나 레드 제플린의 강력함과는 달리 이들에게는 ‘둔중함’ 이라는 무기가 있었고, 그런 헤비니스에 오컬트함을 결합시켜, 보컬리스트인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의 보컬을 통한 그런 악상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하드 록을 헤비메틀로 변화시킨 밴드였다.
특히 데뷔작인 “Black Sabbath” 부터 71년작인 “Masters of Reality” 까지는 헤비메틀의 전형을 확립한 작품들이었고, 이후의 “Vol. 4” 부터는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밝은 사운드를 들려주었지만(“Sabbath Bloody Sabbath” 앨범에서는 무려 예스 출신의 릭 웨이크먼(Rick Wakeman)이 참여했을 정도) 새버스가 당대 최고의 헤비메틀 밴드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새버스는 80년대로 들어오면서 오지 오스본이 밴드를 탈퇴하면서 위기를 겪었으나, 이후에도 로니 제임스 디오(Ronnie James Dio)를 새로 받아들이면서 70년대의 걸작들에 떨어지지 않는 명연을 보여주었고, (뭐 나이 때문에 매우 띄엄띄엄하긴 하지만)최근에까지 헤븐 앤 헬(Heaven and Hell) 등을 통해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Black Sabbath - Paranoid. 새버스의 라이브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대표곡이다
오지 오스본 이후에도 밴드는 불세출의 보컬리스트 디오와 활동을 계속한다. Black Sabbath - Heaven and Hell
인지도라는 면에서는 블랙 새버스와 비교할 수 없지만, 동시대에 흑마술적인 음악을 들려준 -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로도 불리지만(사실 초기 Pink Floyd를 생각나게 하는 면모도 있다) - 대표적인 밴드로는 또한 블랙 위도우(Black Widow)를 꼽을 수 있다.
원래 1966년에 Pesky Gee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이들은 70년에 이름을 블랙 위도우로 바꾸면서 데뷔작인 “Sacrifice” 를 발표하면서 헤비메틀 밴드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고, 새버스와는 달리 이들은 예상 외로 앨범 차트 32위까지 올라갔던 “Sacrifice” 이후에는 정말 기복도 없이 인기가 없었지만(4집인 “IV” 는 레이블을 찾지 못해 밴드가 해체한 이후에야 겨우 발표되었다) 이후 많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에 의해 컬트로서의 위치를 인정받아 90년대 후반부터 재조명되고 있는 밴드의 하나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 인기 없던 밴드의 차기작이 될 “Sleeping with Demons” 에, 오지 이후 가장 오랫 동안 블랙 새버스의 보컬리스트였던 토니 마틴(Tony Martin)이 게스트로 참여하게 될 정도. (뭐 난 토니 마틴의 블랙 새버스 시절 음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만)
(사진은 블랙 위도우의 라이브. 왜 여자분이 나오느냐 하면...이들은 스테이지에서의 마녀 퍼포먼스로 악명을 날렸다. 물론 지금 보면 좀 코믹하게도 느껴지는 광경이지만)
Black Widow - Come to the Sabbat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경우)통상 퍼져 있는, 록 음악의 거칠고 반항적인 이미지를 생각할 때 헤비메틀의 록의 적자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헤비메틀은 1960년대의 ‘진정한 록’ 에서의 일탈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60년대의 청년문화의 기치는 1969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 및, 미국의 징병제 폐지와 함께 허물어져 갔고, 평화를 부르짖던 히피들도 좌절을 맛보게 되면서 청년문화의 혁명은 사실상 끝장나 버렸다. 사실, 공동체적인 음악이라기보다는 감상용 음악에 더 가까워 보였던 프로그레시브 록과는 달리, 헤비메틀은 그런 반문화적 정신을 좀 더 강하게 보여준, 새로운 하위 문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진정한 록 스피릿 식으로 무조건 포장하는 것도 우스운 감이 있을 것이다. 이전 시대의 록의 저항성이나 히피 정신이 그랬던 면이 있듯이, 헤비메틀의 이런 반문화적 특성도 뮤직 비즈니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70년대(적어도 초중반)에는 헤비메틀은 그렇게 평단이나 뮤직 비즈니스에서 환영받는 음악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라디오나 TV에서 헤비메틀 음악을 듣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특히나 히피 록 평론가들은 헤비메틀을 극도로 폄하했다. 그래서 정작 당시의 메틀 밴드들이 헤비메틀 밴드라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기존의 프로그레시브 록 등이 처음의 실험성 등을 상실하면서 그 힘을 잃어간 반면, 헤비메틀은 이후에도 양식상의 변화 및 성장을 계속해 나가면서 이후 록 음악의 주류에 가까운 지위를 얻었고, 그러한 움직임은 이후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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