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국민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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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블라블라

시월의 국민가수

[정동 에세이]“시월엔 나도 국민가수랍니다”
 
이용 | 가수



모름지기 ‘국민가수’라고 하면 코흘리개 아이들부터 노년층까지 그의 이름을 알고,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떳떳하게 “나는 국민가수다”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국민가수라고 주장하면 아마 이 글의 말미쯤에 살벌한 댓글들이 올라올 게 뻔하다. 네가 국민가수면 나는 국민 남동생이다, 네가 국민가수면 조용필은 뭐냐 등등. 뭇매를 맞고 피흘리면서 “국민여러분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은 발언을 한 것 같습니다”라고 사과해야 할 것이다. 
하긴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비틀스나 스웨덴인들이 사랑하는 아바,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마이클 잭슨쯤은 돼야 국민가수가 아닐까.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많은 분이 알고 있다시피 시월이 되면 가수 이용의 스케줄 표는 빡빡해진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로 시작하는 ‘잊혀진 계절’ 덕분이다. 지난해 10월의 마지막 밤, 나는 국민가수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가수 부럽지 않은 경험을 했다. 그날의 마지막 스케줄은 마산 공설운동장이었다.

서울과 전국을 오가는 스케줄을 마감하고 저녁 무렵 마산 공설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함을 하고 말았다. 8000여명의 관객이 꽉 들어찬 공설운동장에서 펼쳐지는 공연에 출연하는 가수 라인업을 보고 당혹스러웠다. 해체되기 전의 동방신기를 비롯해 그 당시 인기를 얻고 있는 아이돌 그룹이 총출동하는 무대였다. 
한마디로 나는 그곳에 잘못 온 셈이었다. 슬쩍 객석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사랑하는 중년의 여성팬들은 안보이고, 10대 소녀팬으로 인산인해였다.



시월만 되면 이용을 '국민가수'로 만들어주는 노래, <잊혀진 계절>


그때까지만 해도 중년 팬들 앞에서 ‘잊혀진 계절’을 부르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시월의 멋진 밤을 장식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열광적인 10대팬들이 오로지 기다리는 건 동방신기 오빠였지, 이름도 ‘듣보잡’인 이용이 아니었을 게다. 
나는 주최 측에 아무래도 나를 끼워넣은 건 잘못된 것 같으니 그냥 돌아가면 안되겠느냐고 물었다. 가수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데 객석에서 썰렁한 반응을 보일 때다. 그런 고통스러운 장면을 떠올리면서 나는 되도록 무대에 서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예고된 무대여서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결국 소녀팬들의 열광 속에 공연을 끝낸 한 아이돌 그룹의 뒤를 이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사력을 다해 분위기를 잡고 ‘잊혀진 계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 망신 좀 당하지 뭐, 딸보다도 어린 팬들 앞에서 박수를 받겠다는 건 내 욕심이지. 내가 국민가수도 아닌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많은 소녀들이 내 노래를 따라부르는 게 아닌가.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그곳에 꽉 들어찬 모든 소녀들이 따라하는 것이었다. 분명 객석에는 <열린음악회>나 <가요무대>에서 만나던 중년 여성팬들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아이돌 그룹 못지않은 박수와 환호 속에서 무대를 끝냈다.

여하튼 감격적인 무대를 마치고 내려와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동방신기가 내 노래를 리메이크해 발표하는 바람에 모든 소녀팬들이 ‘잊혀진 계절’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무식하게도 동방신기가 ‘잊혀진 계절’을 리메이크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동안 조관우나 박화요비, 김범수 등 많은 후배가수가 리메이크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이돌 그룹까지 내 노래를 리메이크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동방신기 출신 김재중(영웅재중)이 솔로로 부른 <잊혀진 계절>



덕분에 기분좋은 시월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하고 나오면서 몇몇 중년 여성팬들에게 둘러싸여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저편에서는 동방신기를 보려는 소녀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완소 중년팬’이 있었다. 그때 한무리의 소녀들이 몰려와서 사인을 요청했다.

“아저씨, 사인 좀요. 아저씨도 우리 오빠들 노래 잘 부르시던 걸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한 중년 여성팬이 발끈하면서 한마디 했다. 
“얘들아. 그 노래 원래 이 오빠가 부른 거야. 왕년에 이 오빠도 하이틴 팬들이 줄을 섰어, 얘. 지금은 국민가수야. 국민가수.” 
그래서 그날 난 졸지에 국민가수가 됐다. 소녀팬들부터 중년여성, 소년들부터 아저씨들까지 따라 부르는 노래를 히트곡으로 갖고 있는 국민가수가 됐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나는 내내 행복했다. 그래, 시월이 되면 난 누가 뭐래도 국민가수다. 시월의 마지막 날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갖 방송에서 내 노래가 흘러나오는 감격을 맛볼 수 있는 가수가 아닌가. 국민가수 선배님들, 용서해 주세요. 시월엔 이용도 국민가수랍니다.




박화요비의 <잊혀진 계절>